짜고치는 고스톱: 네고

우리 회사는 왜 비싸게 사고도 '잘 샀다'는 착각을 할까?

by 구매가 체질


일반적인 회사의 구매 프로세스는 교과서적으로 완벽해 보입니다.


현업 부서가 필요한 물품의 1차 견적을 받아오면, 구매팀이 전문성을 발휘해 가격을 협상하거나 더 나은 업체를 찾아 계약을 진행합니다. 요청자와 실행자를 분리해 비리 가능성을 차단하고, 상호 견제를 통해 비용 효율을 꾀하는 지극히 합리적인 시스템입니다.


이론상으로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완벽해 보이는 설계도 뒤에는, 현업 담당자들만 아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있습니다. 교과서는 틀렸습니다. 이 이상적인 시스템은 어떻게 회사를 조용히 병들게 하는 걸까요?


SCENE #1: "네고할 거리를 만들어오세요"


모든 문제의 시작은 구매팀의 암묵적인, 혹은 노골적인 압박에서 비롯됩니다.


"선임님, 1차 견적은 네고할 여지를 좀 남겨서 받아오세요. 아시죠?"
"너무 타이트하게 받아오면 우리가 일하기 힘듭니다. 어차피 깎을 건데요."


이 요구의 속내는 명확합니다. 구매팀의 핵심 성과지표(KPI)는 '최초 제안가 대비 비용 절감액'으로 측정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의 '성과'는 애초에 부풀려진 가격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성공적인 네고'라는 쇼를 연출하기 위해, '거품 낀 견적서'라는 무대 장치가 반드시 필요한 셈입니다.


결국 현업 담당자는 시장의 진짜 가치를 파고드는 대신, 구매팀의 '네고 쇼'를 위한 들러리가 됩니다. 적당히 비싼 견적을 받아오는 비효율적이고 소모적인 역할을 떠맡게 되는 것입니다.


SCENE #2: 모두가 행복하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비극


이 기묘한 '윈윈윈' 게임의 판이 깔리면, 관련된 모두가 단기적으로는 만족합니다.


협력업체: 게임의 룰을 숙지한 영리한 플레이어로서, 1차 견적에 넉넉한 이윤을 붙여 제출합니다. 예상했던 네고 요청에 생색내며 가격을 내려주고도, 애초에 기대했던 수익을 손쉽게 확보합니다.


구매팀: 쇼의 주인공으로서, 화려한 네고 실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습니다. KPI 보고서에 'O억 원 비용 절감'이라는 자랑스러운 한 줄을 새기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합니다.


현업 부서: 갈등을 피하고 안도하는 조연으로서, 원하는 물품을 문제없이 구매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복잡한 과정에서 벗어납니다.


하지만 이 모두가 웃는 무대 뒤편에서, 정작 주인공이어야 할 '회사'는 조용히 야위어갑니다.


1억에 살 수 있었던 물건을, 1억 2천만 원짜리 견적을 받아 1억 1천만 원에 '잘 샀다'고 자축하는 희비극이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규칙'이 아닌 '구조'의 문제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구매팀의 성과를 '최초 견적 대비 네고율'이라는 왜곡된 지표로 측정하는 데 있습니다. 이 방식은 구매 담당자를 '회사의 이익을 지키는 전문가'가 아닌, '견적서의 숫자를 깎는 기술자'로 전락시킵니다.


진정한 혁신은 '더 나은 규칙'이 아닌 '더 나은 구조 설계'에서 시작됩니다. 국가가 입법, 사법, 행정으로 나뉘어 서로를 견제하며 건강함을 유지하듯, 구매 프로세스 역시 '역할과 책임이 명확히 분리된' 건강한 견제 구조가 필요합니다.


입법부 (기준을 세우는 자 - 현업 부서): 구매의 '법률안'을 발의합니다. 시장에서 해당 제품/서비스를 가장 잘 아는 현업 부서가 책임감을 갖고 1차 시장 조사를 하고, 최선을 다해 네고한 '현실적인 최저 견적'을 기준가로 상신하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부터 '부풀리기'가 들어설 여지를 없애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들의 역할은 '요청'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으로 격상되어야 합니다.


행정부 (가치를 더하는 자 - 구매팀): 발의된 '법률안'을 검토하고 집행하며 가치를 더합니다. 구매팀의 역할은 현업이 가져온 견적을 단순히 다시 깎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전문성은 ① 현업이 제시한 기준가가 정말 시장 최저가 수준이 맞는지 검증하고, ② 더 넓은 네트워크를 통해 더 나은 대안 업체를 발굴하거나, ③ 전사 통합 구매 등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여 추가적인 이익을 만들어내는 데 있습니다. 이들의 KPI는 '네고율'이 아닌 '기준가 대비 추가 가치 창출액(Added Value)'이 되어야 합니다.


사법부 (과정을 감독하는 자 - 시스템/감사):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감독합니다. 현업이 어떤 근거로 기준가를 설정했는지, 구매팀은 어떤 과정을 통해 추가 가치를 만들어냈는지, 최종 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모든 기록을 시스템에 남기고 공개합니다. 데이터가 판사가 되어 절차의 정당성을 판단하고, '관행'이나 '유착'이라는 변명이 설 자리를 없애는 것입니다.


이 구조는 각자의 전문성을 존중하면서도, 서로의 결과물을 건강하게 견제하고 협력하게 만듭니다.


현업은 책임감을 갖고 최선의 기준을 제시하고, 구매팀은 그 기준 위에서 전문가로서의 진짜 실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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