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을 사는 일의 어려움
세포 배양 배지나 필터 같은 원부자재는 간단하다.
제품 코드, 공급사, 규격이 명확하다. 바이오리액터나 크로마토그래피 장비도 마찬가지다. 모델명, 사양, 성능 기준(URS, User Requirement Specification)이 있다. 하지만 용역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고객사 프로젝트인데, 분석법 개발 좀 빨리 해주세요.
밸리데이션 지원이 필요해요. GMP 규정에 맞게...
공정 특성 분석(PC) 보고서 하나만 부탁드립니다.
내부 부서에서 이런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구매담당자는 막막해진다.
정확히 '무엇을' 사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공정개발(PD)팀에서 다급한 의뢰가 들어왔다.
고객사 신약 후보물질의 생산 공정에 사용할 일회용 백(Single-use Bag)에 대한 용출물/추출물(Leachables & Extractables) 평가 연구용역을 맡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예산은 5천만 원, 일정은 4개월.
고객사 임상 시료 생산 일정에 맞춰야 하니 모든 것이 촉박했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드러났다.
구매팀이 외부 시험기관(CRO)을 선정하기 위해 세부적인 시험 범위를 묻자, PD팀의 답변은 모호했다.
"BPOG 가이드라인에 따른 표준적인 평가면 됩니다."
표준적인 평가?
어떤 표준을 말하는가?
USP <665>를 포함할 것인가? 특정 용매에 대한 시뮬레이션 연구가 필요한가?
분석법 감도(LOQ)는 어느 수준까지 요구되는가? 세부 항목이 명확하지 않으니, 시험기관들의 견적은 천차만별이었다. 한 곳은 기본적인 스크리닝 테스트만 제안하며 2천만 원을 불렀고, 다른 곳은 GMP 기준에 맞춘 전체 밸리데이션을 포함해 8천만 원을 요구했다. 당장 예산 초과 위험과 고객사 프로젝트 지연이라는 두 개의 시한폭탄이 눈앞에 다가왔다.
이 모호함은 단순한 소통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용역은 '보이지 않는 데이터와 전문성'을 사는 일이다.
유형의 물건처럼 만져보고 확인할 수 없기에, 계약 후에야 문제가 터진다.
예를 들어,
1. 분석법 개발 용역의 경우 "빠른 개발"이라는 모호한 목표 때문에, 나중에 기술이전(Tech Transfer) 과정에서 재현성이 떨어져 QC팀에서 사용할 수 없는 비극이 발생한다.
2. 밸리데이션 용역이라면, "GMP 규정에 맞게"라는 말만 믿었다가 최소한의 서류 작업만 받고, 나중에 규제기관 실사에서 데이터 완전성(Data Integrity) 미흡으로 지적받는 치명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보고서 작성 용역? "보고서 하나"로 끝내면, 논리와 데이터의 깊이가 부족해 고객사 제출이나 규제기관 인허가(IND/BLA) 신청 자료로 쓸 수 없게 된다.
첫째, 의뢰 부서의 전문성 착각이다.
그들은 세포 배양이나 정제 공정의 전문가이지만, 외부 용역을 관리하고 구매하는 과정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자신들이 원하는 서비스의 범위와 깊이를 구체적인 요구사항(SOW, Statement of Work)으로 정의하지 못한다.
둘째, 역할과 정보의 불일다.
구매팀의 전문성은 기술적 심층 분석이 아닌, 공정한 프로세스 관리, 리스크 분석, 협상에 있다. 문제는 기술적 요구사항이 불완전하고 모호한 상태로 구매 프로세스가 시작될 때 발생한다. 구매팀은 주어진 정보 내에서 최선의 판단을 내려야 하므로, 객관적으로 비교 가능한 지표인 '가격'을 중심으로 검토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구매팀의 능력 한계가 아니라, 의사결정에 필요한 핵심 정보가 제때 공유되지 않는 프로세스의 문제인 셈이다.
셋째, 계약의 불완전함이다. 용역 계약서는 물품 계약처럼 명확한 규격을 담기 어려워 '결과물'의 정의가 모호해지기 쉽다. 이 때문에 분쟁이 발생하고, 추가 비용(Change Order)이 발생하거나 프로젝트 일정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지연된다.
실제로 타사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빈번히 듣게 되었다.
QC팀에서 의뢰한 "신규 분석법 개발 용역"의 결과물이 내부 밸리데이션 기준을 통과하지 못해 재개발에 들어가면서 고객사와의 신뢰에 금이 갔다. 비용은 두 배로 뛰었고, 프로젝트는 3개월이나 늦어졌다. IT 부서의 "데이터 완전성 컨설팅"에서는 업체가 우리 회사의 QMS(품질경영시스템)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일반적인 해결책만 제시해, 결국 FDA 실사 준비 과정에서 더 큰 혼란을 겪었다. 이 모든 사고의 뿌리는 초기 의뢰의 '모호함'이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요구사항 정의서(URS)의 템플릿화'다.
회사 차원에서 주요 용역별로 표준 의뢰 템플릿을 만들어, 세부 요구사항을 체크리스트 형태로 정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용출물/추출물 평가 용역이라면 다음과 같다.
평가 대상 자재 및 공정 정보: (예: A사 필터, B사 튜브 / 접촉 시간, 온도, 버퍼 성분)
적용 규제 가이드라인 및 방법론: (예: BPOG, USP <665> 준수 / 분석 장비: LC-MS, GC-MS)
요구 결과물 형식: (보고서 포맷, Raw data 및 AET/SCT 계산식 포함 여부, 규제 제출용 자료 형식)
핵심 성과 지표(KPI): (분석법의 정량한계(LOQ), 검출한계(LOD) 등)
이 템플릿을 의뢰 부서가 작성하게 함으로써, 구매팀은 명확한 기준으로 업체를 비교 평가할 수 있다. 또한, 구매팀, 의뢰 부서, 그리고 잠재적 공급업체 간의 '사전 기술 미팅(Technical Clarification Meeting)'을 의무화하여 모든 모호함을 해소해야 한다.
업체 선정 시에는 가격뿐만 아니라 과거 실적, 전문 인력, 품질 시스템(Quality System)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기술 기반 종합 평가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마지막으로, 용역 구매는 '파트너십'으로 접근해야 한다.
단순한 거래가 아니라, 업체와의 지속적인 소통과 협력을 통해 보이지 않는 가치를 명확한 결과물로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래야만 사고를 예방하고 고객사가 만족하는, 나아가 규제기관이 신뢰하는 진정한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이런 변화가 없다면, 구매팀의 한숨은 계속될 것이고, 회사의 경쟁력과 고객 신뢰도는 떨어질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사는 일, 더 이상 위험한 모험으로 남겨둘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