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률 #매출인식 #계약서 #회계팀
조선소 회계팀 김대리는 오늘도 머리가 아프고 어질어질하다.
올해 수주한 대형 프로젝트 덕분에 1년 내내 쉴 틈 없이 바빴다. 야근과 주말 출근으로 쌓아 올린 실적. 그런데 연말 결산을 앞두고 받아 든 예상 재무제표는 어딘가 이상했다.
매출액은 역대급으로 찍혔는데, 매출총이익률은 터무니없이 낮았다. 열심히 일하고도 남는 게 없는 장사를 한 셈이다.
"분명 우리가 잘하고 있는데, 왜 숫자는 바보 같을까?"
이런 고민, 비단 김대리만의 것은 아니다. 조선, 건설, 대형 IT 프로젝트처럼 '진행률'로 매출을 인식하는 업계의 실무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주했을 문제다. 원인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 있다. 바로 **'계약서'**다.
우리는 배를 만드는 회사지, 엔진을 파는 회사가 아니다.
이 당연한 명제가 계약서에 제대로 담겨있지 않으면 숫자는 왜곡되기 시작한다. 진행률 기준 매출 인식의 핵심은 '우리가 실제로 한 일(수행의무)'만큼만 수익을 잡는 것이다. 대부분 '총예상원가 대비 실제투입원가' 비율로 진행률을 계산하는데, 바로 여기서 첫 번째 단추를 잘못 끼운다.
선주가 "독일 A사의 100억짜리 엔진을 꼭 써주세요"라고 지정했다고 치자. 우리는 그저 구매를 대행해 주는 '심부름'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100억을 우리 프로젝트의 '투입원가'로 덜컥 잡아버리면 어떻게 될까?
100억이라는 거대한 비용이 분모(총예상원가)와 분자(실제투입원가)에 동시에 들어가면서 진행률을 급격히 끌어올린다. 덕분에 매출은 초반에 확 늘어나지만, 사실상 마진이 없는 '심부름 비용'이었기에 전체 이익률은 곤두박질친다.
그래서 계약서에 우리의 진짜 일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첫 번째 조항이 필요하다.
제 X조 (진행률의 측정) 본 계약의 수익은 '총 계약 추정원가 대비 실제 발생 누적원가'의 비율(원가 기준 진행률)에 따라 인식한다.
여기까지는 평범하다. 하지만 진짜 마법은 다음 조항에서 시작된다.
모든 원가를 똑같이 취급하면 안 된다. 우리 프로젝트의 핵심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원가(설계, 강판 가공, 용접 등)는 주인공이지만, 선주의 요청으로 잠시 스쳐 지나가는 '100억짜리 엔진'은 엑스트라다.
계약서에 이 엑스트라의 역할을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즉, "이 항목은 우리 매출을 계산하는 데 포함되지 않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제 Y조 (진행률 산정의 예외) 제 X조에도 불구하고, '총 계약 추정원가' 및 '실제 발생 누적원가'에는 [별첨]에 명시된 '발주처 지정 구매대행 품목(Cost Pass-Through Items)'의 매입원가는 포함되지 아니한다.
이 조항 하나가 김대리의 재무제표를 구원한다. 100억짜리 엔진은 이제 매출 부풀리기의 주범이 아니라, 재무상태표에서 '대신 내준 돈(채권)'으로 조용히 처리된다. 우리의 수익은 오직 이 심부름의 대가로 받는 '관리 수수료'뿐이다.
이제 재무제표는 우리의 진짜 실력을 보여준다. 뻥튀기된 매출과 초라한 이익률 대신, 핵심 역량인 '선박 건조 용역'에서 나오는 건강한 매출과 이익률이 찍히게 된다.
물론 이 외에도 계약서에 담아야 할 내용은 많다.
돈 받는 시점 (대금 청구): 매출 인식과 실제 현금흐름은 다르다. 언제, 어떤 기준으로 돈을 청구할지(마일스톤 방식 등) 명확히 해야 회사가 안정적으로 돌아간다.
변수에 대비하기 (계약 변경): "계획이 바뀌었는데요." 클라이언트의 이 한마디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계약 변경 시 추가금과 일정을 어떻게 조정할지 절차를 명시해야 한다.
위험 떠넘기기 (통제 이전): "엔진은 조선소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당신(선주) 겁니다. 파손 위험도 당신 책임이에요." 이처럼 통제권과 위험이 누구에게 있는지 명시하는 것은 우리를 보호하는 든든한 방패가 된다.
결국 회계는 단순히 숫자를 기록하는 행위가 아니라, 거래의 실질을 재무제표라는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번역의 가장 중요한 원문이 바로 계약서다.
계약서를 법무팀만의 영역이라 생각하지 말자. 숫자의 논리와 경제적 실질을 가장 잘 아는 회계팀이 계약서 작성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 잘 만든 계약서 한 장이 연말 보너스를 지켜줄 최고의 무기가 될 수 있다. 김대리의 내년 재무제표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