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정선의 붓 아래, 나를 비추다

조선의 여름을 걷다(겸재 정선의 그림을 보고)

by 청일


한 달 전, 예교리 동기들과 겸재 정선의 전시회를 함께 보기로 약속했었다. 미술을 사랑하는 임지영 작가의 제안으로 성사된 자리였다. 이른 아침, 리움미술관에서 호암미술관으로 향하는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한강진역으로 향했다. 작년 겨울, 처음으로 호암미술관을 찾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잔설이 남아 있던 그 계절의 미술관은 을씨년스럽고 차가운 공기로 가득했지만, 봄을 지나 초여름으로 향하는 오늘의 풍경은 전혀 달랐다. 초록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햇살은 부드럽게 대지를 감쌌다. 완연한 소풍날이었다. 미술관 앞뜰에는 하얀색과 붉은색 작약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고, 오랜만에 마주한 꽃이 반가워 한참을 바라보았다.

관람객은 생각보다 많았다. 아직 오전인데도 미술관 안팎은 사람들로 붐볐고, 멀리서부터 이 전시를 보러 온 이들의 열의가 느껴졌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 그가 남긴 화폭의 세계를 마주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이른 아침의 피곤함은 잊혀졌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작품은 《금강전도》였다. 겸재가 바라본 금강산은 단지 하나의 경관이 아니라, 거대한 정신의 지형처럼 다가왔다. 특히 《봉래전도》는 3미터가 넘는 스케일로 금강산의 웅대한 모습을 화폭에 옮겨놓았다. 정선의 붓끝은 단순히 산과 물을 그리는 것을 넘어서, 자연이 지닌 고요함과 숭엄함을 실어내고 있었다. 그 앞에 서자, 나는 무언가에 압도된 듯 숨을 고르게 되었다.

전시는 1층과 2층으로 나뉘어 있었고, 금강산 뿐 아니라 한양의 풍경과 조선 각지의 명승지가 그의 붓 아래 펼쳐졌다. 하나하나의 그림을 따라가다 보니, 마치 정선과 함께 산천을 유람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단순한 ‘풍경화’의 감상을 넘어서게 한 것은, 바로 그 속에 담긴 ‘사람’이었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는 생각보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자연은 찬란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자연을 바라보는 사람, 그 풍경을 걷는 사람, 말을 타고 지나가며 고개를 돌려 절경을 감상하는 사람들! 그들이 있기에 그의 산수는 살아 있다. 그림 속의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스스로를 한 조각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그들은 자연의 일부가 되어, 때로는 그 품에 안기고, 때로는 그 앞에 고개를 숙인다. 나는 이 장면들 앞에서, ‘풍경’이 아니라 ‘사람’의 자리, 그리고 그 유한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정선이 바라본 사람은 결코 자연을 지배하거나 변형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연 속에서 겸허하게 제 자리를 찾는 인간의 모습을 끊임없이 그려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자연을 사랑했다는 것 이상으로, 그 안에 깃든 인간의 삶을 아꼈기 때문이리라.


전시를 마무리하며, 나는 평소처럼 가장 마음에 남은 그림 한 점을 골랐다. 《고사관폭도》. 폭포 아래 자리한 한 선비가 거문고 하나와 책 한 질을 옆에 두고,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다. 그는 아마 여름날의 더위를 식히러, 조용한 자연 속으로 들어온 것이리라.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기타 하나, 책 한 권을 들고 계곡의 그늘에서 한가로이 여름을 나는 중년의 남자와도 같다. 시대는 다르지만, 더위를 식히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시원한 계곡물, 졸졸 흐르는 물소리,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물멍이라 부르는 지금의 풍경이, 조선 시대에도 그곳에 있었다.

폭포수 아래, 자연의 품에 앉아 있는 그 선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거문고를 연주하며 고요한 사유에 잠겼을까, 아니면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세상 모든 시름을 잠시 잊고 있었을까. 그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여름이 되면 책 한 권과 블루투스 스피커 하나 챙겨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쉼이란 바로 그런 순간에 있지 않을까.


정선의 그림은 단지 조선 시대의 산수화를 넘어서,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쉼과 겸허함의 감각을 일깨워준다. 자연 앞에 선 인간의 자리, 그리고 그 속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삶의 모습. 나는 오늘, 그 그림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비워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