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춘선숲길을 거닐다
아침 햇살은 유난히 맑고 상쾌했다. 어제 내렸던 폭우가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하늘은 마른 수건처럼 말끔히 씻겨 푸른빛을 더욱 진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 푸르름은 마치 가을 하늘처럼 높고 맑았고, 공기의 결조차 투명하게 느껴질 만큼 청명했다. 오늘은 거래처에 납품할 원두가 있어서 로스팅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딸아이를 직장에 데려다주고 난 뒤, 나는 공릉에 위치한 우리 카페로 향했다. 볕이 따뜻해 커피 볶는 냄새가 유난히 더 깊고 향긋하게 퍼질 것 같았다.
로스팅을 마친 후, 카페 앞을 지나는 경춘선숲길이 괜스레 나를 끌어당겼다. 몸과 마음을 잠시 풀어줄 겸 걸어보기로 마음먹고 밖으로 나왔다. 철길을 따라 난 산책로엔 연초록 새순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어린 잎사귀들은 파릇파릇하게 빛나며 햇살을 받아내고 있었다. 앙증맞은 그 모습들이 마치 “봄이 왔어요” 하고 속삭이는 듯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중 산수유나무에 눈길이 머물렀다. 새로 돋은 잎들 사이로 검게 쪼그라든 산수유 열매들이 말라붙은 채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생명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시간이 한 나무에 얽혀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새순과는 다르게, 그 검은 열매들은 이미 생을 다한 채 말라붙어 있었지만, 가지를 떠나지 못하고 버티고 있었다. 봄날의 따스함 속에서도 한겨울의 그늘을 품은 듯한 모습이었다. 가야 할 때를 알면서도 떠나지 못한, 아니 떠나지 못하고 남은 것들의 안쓰러움이 그 위태로운 풍경 속에 담겨 있었다.
경춘선 철길은 이제 열차 대신 사람의 발걸음으로 채워진다. 옛 철길이 산책로로 다시 태어난 이후, 공릉동의 풍경은 많이 달라졌다. 철길을 따라 예쁜 카페들과 음식점이 하나둘 들어서며, 이곳은 어느새 주민들과 나그네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거리로 변해갔다. 평일 오전의 느긋한 시간에도 삼삼오오 모여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로 철길은 조용히 북적였다.
길가에 놓인 긴 나무 의자에는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바람이 실어 나르는 말소리가 그들의 지난날을 짐작하게 했다. 그중 한 할머니는 전화기를 들고 엄마와 통화를 하는 중인 듯했다. “엄마 몸은 좀 어때? 몸이… 어떠냐고, 몸이… 엄마, 몸이 어떠냐고…” 할머니는 전화기 너머 어머니에게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목소리는 점점 커졌지만, 애절한 마음만큼은 작게 울렸다. 짧은 외침이었지만, 그 말은 길게 남아 마음속에 여운을 드리웠다. 그 짧은 순간 속에 여러 겹의 세월과 정이 응축되어 있는 듯했다.
철길의 나무 고임목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기차는 더 이상 이 길을 달리지 않지만, 그 흔적만은 묵묵히 남아 산책자들의 발길을 맞는다. 녹이 슨 철로 위로 떨어지는 햇살, 잔잔히 흔들리는 풀잎, 이따금 스치는 웃음소리와 먼 데서 울려오는 새소리가 어우러지며 봄의 풍경을 완성했다.
예기치 않았던 짧은 산책이었지만, 그 속에서 사람 사는 냄새와 자연의 숨결, 시간의 흐름까지 모두 마주할 수 있었다. 아침의 상쾌함과 로스팅된 커피 향, 그리고 오래된 철길 위로 흐르는 봄날의 햇살까지—이 모든 것이 오늘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