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과 철, 그리고 무(無)

이우환 미술관을 들어서며

by 청일


돌과 철 그들의 대화


강가에서 긴 시간을 견디며 다듬어진 돌하나. 햇살과 비, 흐르는 물의 손길 속에서 조금씩 깎이고, 부서지고, 다시 매끈해졌다. 세월은 돌을 다듬는 장인이었다.


철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불과 망치 속에서 태어나, 뜨거운 열기와 무거운 타격 속에서 제 모양을 간직한 철. 돌이 물과 바람의 품에서 길러졌다면, 철은 불과 쇳물의 고통 속에서 빚어진 것이다. 둘의 출생지는 다르고, 성장의 과정은 더욱 달랐다.


그런데 지금, 이 두 존재가 나란히 놓여 있다. 전혀 다른 생애를 걸어온 것들이 뜻밖의 인연으로 한 자리에 서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묵묵한 울림이 생겨난다.


나는 두 존재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단단한 두 물성이마주했을 때 일어나는 둔탁한 부딪힘이 아니라 둘의 공간이 만들어내는 묘한 안정감이었다.

둘 사이에 놓인 공간은 겉으로는 비어 있는 것 같지만, 그 틈은 공허가 아니라 서로의 숨결이 드나드는 통로였다. 돌은 묵묵히 철을 향해 기운을 내어주고, 철은 단단한 호흡을 돌에게 되돌려 보내고 있었다. 강성과 강성의 만남은 밀어냄이 아니라 새로운 물결이었다. 그 사이에 일렁이는 것은 침묵이었고, 동시에 대화였다.


나는 한참을 그 장면 속에 머물렀다. 처음에는 이방인처럼 지켜보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더 이상 바깥에 있지 않았다. 내가 돌이 되어 철을 향해 말을 걸었고, 철이 되어 돌의 침묵을 들었다. 그렇게 나는 돌이자 철이 되었고, 동시에 나 자신을 잃어갔다. 경계는 허물어지고, 존재의 무게는 옅어졌다. 마침내 나는 무(無)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사라짐은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자리에 더 깊은 울림이 남았다. 허공에는 돌과 철, 그리고 나의 이야기가 겹겹이 메아리쳤다. 그것은 단순히 사물들의 대화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이 만나 서로를 해치지 않고 함께 머무는 법을 보여주는 따뜻한 노래였다.


인연이란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뿌리를 지닌 것들이, 각자의 강성을 포기하지 않은 채 공백 속에서 교감할 때, 비로소 만남이 완성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나의 생각, 나의 목소리, 나의 욕심을 잠시 멈출 때, 그 빈자리에서 오히려 더 큰 울림이 태어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단단해진 존재들이다. 어떤 이는 세월과 자연의 힘에 의해, 어떤 이는 불과 망치 같은 시련 속에서 단단해졌다. 서로의 길은 달랐지만, 결국 우리는 같은 자리에서 마주한다. 그때 필요한 것은 충돌이 아니라, 공백을 통한 대화일 것이다.


나는 다시 돌과 철을 바라본다. 여전히 그들은 침묵 속에서 기운을 주고받는다. 나는 그들 곁에서 잠시 머문다. 나를 비워내고, 공백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 스미는 울림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내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결코 허무가 아니라, 함께 머무른 것들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돌과 철이 가르쳐준 작은 묵상은 오래도록 내 안에서 메아리친다.

마치 강가의 물결처럼, 불꽃의 흔적처럼,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잔잔히 일렁인다.

추천:

이우환의 책을 읽자

나무와 돌과 철을 바라보는 철학의 깊이와 사유의 시선이 활자가 되어 보석처럼 빛난다. 화가가 아니었다면 시인으로 수필가로 그의 이름을 더 알렸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작품속 강한 물성들의 만남은 충돌이 아니라 대화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고리임을 발견하게된다. 침묵이 만들어 내는 공간의 비움이 오히려 꽉 채워지는 놀라운 순간을 경험하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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