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터렐의 더 리턴
리턴, 어디로부터의 귀환일까?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뜻일진대, 그렇다면 그 ‘원래’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나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을까. 태초의 나, 가장 순수했던 나로 돌아가라는 초대일까. 이분법으로 나뉜 세계 속에서 본래의 형태로 되돌아가라는 의미일까. 그런 물음을 품은 채 나는 미술관으로 향했다.
예약된 시간에 맞춰, 우리 일행은 함께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안내원의 작은 손전등 불빛 하나가 길을 열어주었고, 그 끝에는 관객을 위한 객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바깥의 소음은 완전히 차단되고 도시는 멀리 물러났다. 이곳은 고요와 적막이 지배하는 별세계가 되었다.
한시가 되기를 기다리며 나는 암흑 속에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보이지 않음’ 자체가 이미 무대였다. 소극장 맨 앞줄에서 영화의 스크린 대신 어둠이라는 거대한 캔버스 앞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붉은 테두리가 빛을 발하고 스크린은 암흑으로 한 겹 더 깊어졌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공간 안에 또 하나의 창이 열렸다. 푸른빛이 스며들고, 코발트블루가 번지더니, 자줏빛이 일렁이다가 이윽고 녹색으로 물드는 순간, 나는 색이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우주의 맥박을 느꼈다.
안개가 깔린 듯 몽환적인 기운 속에서 파스텔톤의 빛이 포근히 나를 감쌌다. 마치 불 꺼진 거실에서 환한 방의 문을 열었을 때, 한순간 좁게 흘러나오는 빛의 화각처럼 스며들었다. 색은 흐려지며 번져갔고, 경계 없는 흐름 속에서 파랑은 노랑으로, 분홍은 다시 파랑으로 이어졌다. 빛은 서로에게 기대며 경계 없는 세계를 조용히 그려냈다.
미디어 아트 같은 화려한 영상의 현란함 대신 고요히 변주되는 빛을 바라보는 일은 곧 내 안의 심상을 응시하는 일이었다. 색은 계절처럼 바뀌어 봄의 연둣빛에서 여름의 푸른 물결로, 가을의 깊은 보라에서 겨울의 희미한 회백으로 쉼 없이 이어졌다. 빛은 스스로의 시간을 시나브로 만들어내며 오묘한 세계를 창조하고 있었다.
세상은 바쁘게 흘러가지만, 빛은 고요히 머물러 바라보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제임스 터렐이 오래도록 머물며 쌓아 올린 사유와 철학은 빛의 겹 속에 잠겨 있었고, 나는 감히 그 깊이를 헤아려보았다.
경계 없이 이어지는 색의 변화는 그가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였다. 사고에도, 관계에도, 삶에도 경계란 없어야 한다는 것. 빛처럼 스며들고, 빛처럼 이어지라는 것. 어둠 속에서 마주한 빛의 철학은 이렇게 한 사람의 내면을 조용히 변화시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