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가을비를 바라보며
비는 계절마다 다른 얼굴로 세상을 찾아온다.
봄비, 여름 장맛비, 가을비, 겨울비.
때로는 이슬비, 보슬비라 부르며 다정하게 불리기도 하고,
한겨울에는 눈송이로 변해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봄비는 연초록의 물감을 가득 머금고 내린다.
메마른 대지 위에 단비가 되어 떨어지고,
오랫동안 숨을 죽였던 땅은 그 물기를 머금으며 다시 숨을 고른다.
온 세상은 그 봄비를 마시고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찬다.
꽃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봉오리를 터뜨리고,
들녘과 숲은 앞다투어 연두의 옷을 갈아입는다.
봄비는 단순한 빗줄기가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하는 창조의 손길이다.
그 부드러운 물방울 하나하나가 겨울 동안 잠들어 있던 씨앗을 깨우고,
움틈을 준비한 새싹들에게 용기를 준다.
여름 장맛비는 또 다른 얼굴을 한다.
때로는 가뭄으로 갈라진 대지를 넉넉하게 적셔주는 은혜로운 비가 되고,
때로는 태풍과 함께 몰려와 거대한 물의 벽이 되어 세상을 휩쓸기도 한다.
장맛비는 온순함과 격정을 동시에 품고 있지만
장마가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한층 더 푸르러진다.
나무들은 더욱 짙은 초록을 자랑하고,
논밭의 벼들은 고개를 더욱 당당히 치켜든다.
장맛비는 파괴와 창조, 시련과 성장을 한꺼번에 가져다주는 양면의 신과도 같다
가을비는 노랑, 빨강, 주황, 갈색의 물감을 잔뜩 품고 내린다.
여름 내내 푸르름으로 버텨온 나무들은 그 빗줄기를 맞으며 차츰 색을 바꿔간다.
마지막 화려한 불꽃처럼 단풍의 옷을 갈아입는 것이다.
가을비가 그치고 나면 숲은 울긋불긋한 장막을 드리우고,
계절은 한층 더 깊은 사색으로 물든다.
낙엽들이 하나둘 떨어져 내리는 소리,
그것은 작별의 인사이자 내년을 약속하는 속삭임이다.
가을비는 마치 이별의 화가와도 같다.
한 장면 한 장면을 아름다운 색으로 그려내면서도,
동시에 그 모든 것이 지나갈 것임을 말해준다.
그래서 가을비를 맞으면 마음 한편이 쓸쓸하면서도,
그 쓸쓸함 자체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역설적 감정에 젖어들기도 한다.
겨울비는 움츠린 땅 위에 차갑게 내리 꽂힌다.
때로는 더욱 단단한 얼음을 빚어내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눈송이로 변해 세상을 온통 하얀 장막으로 덮어버린다.
비는 사라지지만 그 흔적은 눈의 결정으로 다시 피어나고,
세상은 고요하고 순결한 색으로 가득 찬다.
겨울비는 차가움 속에 따뜻한 기다림을 품은 비다.
그 속에는 이미 봄을 향한 약속이 숨어 있다.
그 많은 비 중에서도 나는 봄비를 가장 사랑한다.
짙은 회색으로 가득한 세상을 연초록으로 물들이고,
온갖 꽃을 피어나게 하는 그 비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가장 부드러운 힘이기 때문이다.
봄비가 내릴 때, 세상은 다시 태어난다.
가을이 깊어지면 세상은 초록에서 붉은 단풍으로,
그리고 이내 겨울의 흰빛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하지만 그 모든 변화를 겪은 뒤,
언젠가 다시 봄은 돌아온다.
하얗게 덮였던 대지가 녹고,
긴 기다림 끝에 다시 연초록이 번져가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비는 언제나 다른 이름과 얼굴로 오지만,
그 본질은 늘 생명을 품은 순환의 약속이라는 것을.
끝은 곧 시작이고, 이별은 곧 만남의 전주곡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가을비를 맞으며,
겨울비와 눈송이를 견뎌내며
이미 다가오고 있는 봄을 기다린다.
그 기다림 속에서 계절의 비는 내 마음에도 조용히 스며든다.
빗소리는 시간의 노래이고,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며 계절과 함께 늙어가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내 생의 끝자락에도
봄비 한 줄기, 조용히 스며들 듯 내려주기를 나는 조용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