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은아
1. 작가 소개
설은아 작가는 일상적 사물과 언어를 매개로 인간의 관계와 감정, 특히 ‘부재’와 ‘소통’의 문제를 탐구하는 작가이다. 전화기, 문자, 기록물과 같은 매개 장치를 활용해 개인적 기억과 사회적 경험이 교차하는 지점을 설치 작업으로 풀어낸다.
그의 작업은 사라져 가는 아날로그 매체를 호출함으로써 시간의 흐름과 단절의 감각을 환기시키며, 관람자가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작품 안으로 투영하도록 유도한다. 감각적으로는 단순하지만 개념적으로는 역설을 품고 있는 구조가 특징이다.
2. 작품 설명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 설치
본 작품은 다이얼 전화기를 중심으로 구성된 설치 작업이다. 전화기 중앙에 삽입된 “누군가의 부재중 통화로 받아보세요”라는 문장은 소통의 방향을 전복시키며, 연결의 장치가 오히려 단절의 표식이 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다이얼을 돌리는 물리적 행위와 되돌아오는 시간은 즉각적인 디지털 소통과 대비되며, 기다림과 응답 없음의 시간을 상징한다. ‘세상의 끝’은 물리적 종말이 아니라 관계의 단절을 은유하며, ‘부재중 통화’는 닿지 못한 접속의 흔적으로 남는다.
이 작업은 관람자로 하여금 기억 속 연결과 상실의 경험을 환기시키며, 보이지 않는 관계의 지속성에 대해 사유하도록 한다.
3. 나의 감상
마음속 다이얼을 돌리며
다이얼 전화기를 마주하는 일은 이제 낯선 풍경이 되었다.
유년 시절, 육중한 검은 전화기는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손가락을 구멍에 넣어 끝까지 돌리고, 숫자가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그 짧은 정적. 그것은 누군가에게 가닿기 위해 감수해야 했던 최소한의 시간, 어쩌면 관계에 대한 예의였는지도 모른다.
이제 내게 ‘받고 싶은 전화’와 ‘걸고 싶은 전화’는 하나의 이름으로 수렴된다. 부모님이다.
매일같이 반복되던 안부 전화는 일상의 공기와도 같았다.
“별일 없니.”
“밥은 먹었니.”
그 투박한 문장들은 소식이라기보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생존 보고에 가까웠다. 일에 치여 전화가 늦어지는 날이면 부모님의 목소리가 먼저 건너왔다. 그 안부의 그늘 아래에서 나는 오래도록 안온했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뒤, 나는 가장 익숙했던 목적지를 잃었다. 신호음조차 들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이미 정지된 번호를 눌러보던 날이 있었다. 수화기 너머의 막막한 정적은 부재를 증명하는 가장 분명한 단서였다. 윤진화 시인의 말처럼, 아름다운 것들은 이기는 편이 아니라 ‘지는 편’이어서, 달이 지고 꽃이 지듯 부모님도 그렇게 생의 저편으로 스러져 갔다.
시간이 흘러 부모님이 지나온 나이를 거쳐 지나면서 나는 비로소 그분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나이 듦이란 ‘잘 지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위안은 누군가가 나의 자리를 기억해 주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닿지 않는 목소리 대신, 나는 마음속 다이얼을 천천히 돌린다. 그리고 소리 없는 수화기에 대고 우리의 근황을 전한다.
“우리는 모두 건강히, 행복한 일상으로 이 계절을 보내고 있어요.”
보이지 않는 전선 너머에서 부모님은 여전히 자식들을 향한 기도의 주파수를 맞추고 계실 것이라 믿는다.
이제는 세상의 끝으로 가신 부모님을 향해 나도 세상의 끝으로 가고 있다. 그 끝점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잘 지내는 모습을 끝나는 날까지 보여드리고 싶다. 그날 비로소 잘 살다가 왔다고 안부인사 전하고 싶다.
오늘 나는 받지 않을 마음의 전화를 걸어본다.
비록 부재중 통화로 남을지라도, 이 마음의 울림만은 그곳에 닿아 선명한 안부가 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