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드로잉

지나손

by 청일


100일 필사의 마지막 날.

공교롭게도 오늘은 설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첫날이다. 육십갑자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출발선에 선 기분이다.


마지막 그림은 무엇일까 설레는 마음으로 휴대폰을 열었을 때, 화면 가득 펼쳐진 것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도화지였다.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요한 백지 한 장이 오롯이 놓여 있었다.


지난 60년의 삶은 이미 수많은 색채가 깃든 한 폭의 그림이었다. 기쁨과 후회, 도전과 좌절이 겹겹이 쌓여 나만의 독특한 색감을 이루었다. 문득 폴 고갱의 작품이 떠오른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 그 거대한 질문 앞에서 내 삶의 좌표를 가늠해 보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도 내 앞에 놓인 것은 무거운 질문이 아니라 가벼운 ‘가능성’이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도화지. 그것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축복 같은 여백이었다.


이제 마라톤 풀코스의 출발선에 다시 선다. 이미 60년을 달려보았으니, 이제는 기록을 다투기보다 풍경을 응시하며 달리고 싶다. 길가에 핀 작은 꽃에 눈을 맞추고,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구름을 올려다보며, 스치는 바람을 온몸으로 감각하는 달리기. 속도보다는 호흡을, 성취보다는 방향을 생각하며 유유히 나아가고 싶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 이제는 그 질문 끝에 하나를 더 보태려 한다. ‘어떻게 갈 것인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표정으로, 어떤 빛깔로 걸어갈 것인지를 먼저 묻는 삶을 살고 싶다.



자, 다시 출발이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 앞에 선다.

어떤 색을 고르고, 어떤 선을 긋느냐는 온전히 나에게 달려 있다.

나는 나의 속도로, 나의 빛으로 이야기를 채워갈 것이다.

그 여정이 기쁨과 평안으로 물들고, 마침내 가장 나다운 얼굴로 완주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1. 작가 소개: 지나 손 (Gina Sohn)

지나 손은 '선(Line)'과 '공간'의 관계를 탐구하며, 보이지 않는 존재의 흐름과 에너지를 시각화하는 작가다. 그의 작업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인 ‘에어드로잉(Air Drawing)'은 물리적인 캔버스의 경계를 넘어 공기 중에 선을 긋듯 자유로운 사유의 흔적을 남기는 행위를 의미한다. 작가는 대상을 묘사하기보다 비워냄으로써 생겨나는 무한한 가능성에 집중하며, 관객이 그 여백 속에서 스스로의 내면을 마주하게 하는 철학적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2. 작품 설명

본 작품은 형상을 지우고 텅 빈 캔버스를 제시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무한의 공간'을 창출한다. 하단에 정갈하게 새겨진 작가의 서명과 연도는 이 비어 있음이 우연이 아닌, 철저히 계산된 예술적 선택임을 명시한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붓질을 멈춤으로써 작품의 최종적인 완성권을 관객에게 양도한다.

함께 제시된 글귀의 내용처럼, 이 여백은 감상자의 마음 상태에 따라 자동차가 되기도 하고, 그리운 누군가의 얼굴이 되기도 한다. 결국 이 작품은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 곧 당신 자신"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투명한 거울과 같다. 관객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화면 위로 자신의 기억과 갈망을 투영하며, 작가가 열어둔 사유의 공간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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