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라이딩 2일차

우박 속에서 배운 인생의 경우의 수

by 청일



아침에 눈을 뜨니 온몸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습관처럼 안경을 찾아 썼지만 평소와 달리 프레임이 얼굴에 꽉 끼는 생경한 감각이 전해졌다. 거울 속에는 퉁퉁 부은 얼굴이 서 있었다. 겨울 내내 멈춰 있던 몸을 예고 없이 실전에 투입한 대가였다. 어제의 라이딩은 생각보다 정직하게 몸에 새겨져 있었다.

주방에 서서 어제 사두었던 컵라면에 물을 붓고 계란 을 꺼냈다. 식용유가 보이지 않아 프라이 대신 물을 부어 수란처럼 익혔다. 젓가락 끝에서 노른자가 진하게 터져 나왔다. 컵라면 하나와 계란 한 알. 조촐하기 그지없는 상차림이었지만 그 어떤 만찬보다도 만족스러운 허기를 채워주었다. 여기에 직접 내린 드립커피 한 잔의 온기가 더해지니 비로소 완벽한 아침이 완성된 듯했다.


창밖의 빗줄기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거리로 나섰다. 잠시 소강상태인가 싶어 페달을 밟았지만 기다렸다는 듯 다시 굵은 비가 쏟아졌다. 길은 어제처럼 산으로 올랐다가 다시 바다로 내려가는 굴곡을 반복하고 있었다. 경사가 완만한 곳은 힘차게 올랐고 감당하기 어려운 구간은 미련 없이 내려서서 걸었다. 타고 걷기를 반복하는 길, 그것이 그날의 여정이었다.


‘예측불허’라는 말은 아마 이런 상황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비가 쏟아지다 갑자기 햇살이 비쳤고 세찬 바람 끝에 난데없는 우박이 얼굴을 때렸다. 그런데 묘한 일이었다. 이런 변덕스러운 날씨를 몇 번 온몸으로 받아내다 보니 오히려 앞날이 예측 가능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비, 바람, 우박, 그리고 햇살. 그 모든 경우의 수가 이미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그것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 ‘가능한 일’이 되었다.

인생 또한 흔히 예측불허라고들 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생의 고개를 넘어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대부분의 일은 사실 예상 가능한 범위 안에 있다는 것을. 삶의 여러 경우의 수를 미리 마음에 담아두고 산다면 세상에 그리 당혹스러운 일도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을 때리는 우박이 따갑게 느껴질 때조차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었다.


“이런 경험을 또 언제 해보겠어.”


북섬을 지나 남섬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거센 바람에 몸이 휘청였고 쏟아지는 비를 피해 처마 밑을 찾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초라한 모습조차 여행자의 풍경처럼 느껴졌었다. 여행이란 평소라면 결코 겪지 않았을 낯선 감각들을 온몸으로 통과해내는 신선한 체험 같았다.


어촌 마을을 끼고 이어지는 길 위에서 사람들의 삶은 유난히 가까이 다가왔었다. 바닷가 마을을 지나며 눈부신 윤슬을 바라보던 동료가 툭 던지듯 말했다.


“이 경관이 바로 보물이네요.”


그 말이 맞았다. 세상의 보물이 어찌 금은보화뿐이겠는가. 내 곁을 묵묵히 지켜주는 아내와 이제는 각자의 궤도 위에서 당당히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 문득 그 존재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보물이라는 사실이 파도처럼 밀려왔었다.


긴 라이딩 끝에 저녁 식탁과 마주했다. 여러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차갑게 식었던 몸을 따뜻한 사케 한 잔으로 데우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밤이었다.


내일의 라이딩을 위해 서둘러 잠을 청했다.

비록 다음 날 아침에도 몸은 무겁겠지만, 어떤 날씨가 찾아와도 웃으며 페달을 밟을 준비는 이미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