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국 코로나 미 확진자의 심정>이라는 제목을 가진 짤을 보며 ‘사실 난, 슈퍼 항체를 가진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었다. 회사에서는 코로나 확진자가 늘어났고, 같이 밥을 먹은 동료가 확진이 되는 상황에서도 나의 자가 키트는 음성임을 증명해주었으니 말이다. 쏟아지는 비말 속에서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직장인의 고군분투 미션 수행인 셈이었다. 은근히 슈퍼항체를 가진 것이 아닐까라며 뿌듯해하던 어느 날,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코로나가 불쑥 찾아왔다. 양성 판정을 받으며 7일간 세상과의 단절이 시작되었다.
아이러니한 건 ‘단절’되어보니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십 대에서 삼십대로 넘어오며 가장 뚜렷한 변화가 있다면, 아마도 인간관계에 대한 내 태도가 아닐까 싶은데, 서른이 되면서는 누군가와 연결되기보다는 혼자인 것을 더 선호하게 됐다. 조율하고 양보하고, 희생도 감내하며 관계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편했다. 그래서 친구들과의 약속보다는 나 혼자만의 약속이 늘어났고, SNS 유행이나 가십거리를 글자로 옮겨 용건 없이 시시콜콜한 메시지를 주고받는 일보다는 용건만 간단히 하는 연락을 선호했다. 이런 나의 사회적 거리두기는 회사에서의 연차가 쌓일수록 점점 단출해져 갔다. 같은 해에 입사했다는 것만으로 공감과 동질감 들었던 동기들마저 쌓여가는 연차 수만큼 동질감보다는 거리감이 느껴지곤 했다. 저마다의 출퇴근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매번 반복되는 대화 주제에 매번 반복되는 답변이 오고 가는 게 권태롭게 느껴졌던 터라 굳이 연락하지 않아도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먹고살겠지 싶었고, 연락의 부재는 그저 일상의 팍팍함에서 기인하는 당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내가 일상이 팍팍하다는 핑계 삼아 일방적으로 관계를 단절시킨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이 든 건 코로나 때문이었다. 코로나로 자가격리에 들어가자 동료들에게 안부 문자가 왔는데, 그중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들의 연락도 있었다. 그들의 수신 문자들이 내 머리를 띵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내 인간관계 세계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따뜻함을 느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였으면 ‘에이, 나중에 회사에서 마주치면 안부나 묻지’ 하고 말았을 문제를 그들은 굳이 자기 시간을 내어 안부를 물은 것이니까.
아무래도 내가 코로나에 걸린 이유는 ‘너 정말 잘 살고 있는 거야?’를 묻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었던 건 이어지는 친구와의 대화에서였다. 자가격리 중 나는 생일을 맞았다. 나의 축하 인사의 답장은 ‘코로나 조심하세요’ 였는데, 한동안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하며 연락을 안 했던 친구에게 ‘나는 이미 걸렸다가 다 나았어’라는 답장을 받았다. 한때는 매일, 아니 매시간마다 연락하던 사이였는데, 지금은 왜 코로나 걸렸었는지도 모르고 살았을까.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코로나는 7일 동안 나를 세상과 단절시켰지만, 사람과 이어 주기도 했다. 단절된 시간 동안 나는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갔다. 점(.)같이 단절된 ‘관계’는 ‘연결’이라는 또 다른 점(.)을 만나 선(-) 같은 ‘관계’로 이어진다. 단절된 관계는 연결 없이는 이어질 수 없음을 느낀 날들이었다. 팍팍한 일상이라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마저 팍팍해지지 말기를 다시금 곱씹으며. 격리 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