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경제를 위한 조건
인간은 본능적으로 손실을 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 성향은 우리가 경제활동을 수행할 때 명확히 드러난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인간은 생산에 있어선 게을러지기 쉬운 반면, 소비에 있어서는 유난히 진지하고 부지런해진다는 점이다. 이 비대칭적인 태도는 우연이 아니라, 책임과 동기의 구조 차이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경제활동에 대한 비대칭적인 태도를 논하기 이전에, 먼저 '경제활동에서의 진정성'이라는 개념을 명확히 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진정성'이란, 단순히 열심히 일하거나 정직하게 소비한다는 뜻을 넘어서, 자신의 경제행위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책임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는 태도를 말한다. 생산에서의 진정성은 결과에 대한 책임의식과 목적 있는 기획, 소비에서의 진정성은 자원의 한계를 고려한 신중한 판단과 의미 있는 지출로 나타난다. 이는 경제활동이 단순한 반복이나 습관이 아니라, 각 선택이 숙고된 결과로서 작동하는 구조를 뜻한다.
생산 행위는 보통 외부로부터 주어진 과업이거나 계약에 따른 교환이다. 돈을 받고 무언가를 만들어내면, 그 결과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생산자 혼자에게 귀속되지 않는다. 의뢰자, 회사, 팀, 고객 등 다양한 주체들이 그 책임을 분산해 가진다. 따라서 사람은 생산에 대해 "이 정도면 되겠지"라는 타협과 생략을 하기 쉬우며, 이는 게으름으로 이어진다. 또한 생산의 실패는 타인과 나눌 수 있는 여지가 크기에, 행위에 대한 진정성이 옅어지기 쉽다.
반면 소비는 전혀 다르다. 소비자는 선택의 순간부터 결과의 모든 책임을 감내해야 한다. 무엇을 사느냐에 따라 손해를 볼 수도 있고 만족을 누릴 수도 있다. 이 책임은 전적으로 소비자 본인에게 귀속된다. 게다가 인간은 손실회피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소비는 매우 신중하고 고관여적인 행위가 된다. '괜히 샀다'는 후회를 피하고자, 소비자는 성능, 후기, 가격, 사용성, 상징성 등 다양한 요소를 진지하게 고려하게 된다. 이로 인해 소비는 생산보다 훨씬 더 진정성 높은 경제행위가 된다.
이 비대칭 구조는 현대 경제의 건강함을 진단하는 새로운 기준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생산에는 성의없고 책임이 없는 방식으로 접근하기 쉬우나, 소비에는 오히려 자기 존재와 자원의 한계를 고려해 진지하게 임한다. 따라서 경제 시스템이 진정성 있는 소비자의 힘에 의해 구조화되고 선택될 수 있다면, 생산 역시 얕은 효율성과 과장된 마케팅 대신, 실질적 가치 중심으로 재편될 수 있다. 진정성의 밀도가 높은 경제는 자연스럽게 건강한 방향으로 수렴된다.
이런 관점은 특히 '생산력의 폭발'이라는 시대 조건과도 맞물린다. 3D프린터, 로봇, 인공지능 등은 인간이 일하지 않아도 생산이 가능한 구조를 현실화하고 있다. 이미 우리는 필요 이상의 물건이 만들어지는 과잉공급 시대에 살고 있으며,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경고한 공황의 조건과 닮아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생산력은 극단적으로 확대되지만, 임금노동자는 그 생산물을 소비할 충분한 소득을 갖지 못해 결국 '과잉생산의 위기'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즉, 생산된 상품은 시장에 넘쳐나지만 그것을 구매할 유효수요는 부족한 상태가 되어, 자본은 축적의 길을 잃고 불황에 빠진다는 것이다. 공급이 충분하고도 남는 시대에는, 인간의 생산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된다.
여기서 기본소득은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한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인간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해 억지로 생산하지 않아도 된다. 생산에 대한 압박이 줄어들면서, 어떤 사람은 생산에서 손을 떼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생산에 투자하는 시간을 줄이며 '게을러질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하지만 인간의 손실회피적 성향은 여전하며, 기본소득이라는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오히려 더 커진다. 소비에 대한 진지함은 더욱 강화된다.
이 변화는 경제구조를 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무책임한 생산은 줄어들고, 고민을 동반한 소비의 비중이 커지며, 시장에는 진정성 있는 상품과 선택만이 남는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모든 상품에 대해 가격 상승에 대한 저항이 강해진다. 소비자는 한정된 자원 안에서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되며, 이로 인해 생산자는 과잉 프리미엄을 요구하기 어려워진다. 이는 생산 효율성과 기술 개선을 유도하며, 결과적으로 과도한 물가 상승을 억제하고 적정 인플레이션 안에서 경제 성장을 유도하게 된다.
결국 이 모든 흐름의 핵심은 인간의 본질적인 비대칭성에 있다. 생산에는 게을러지고 소비에는 진지해지는 인간의 구조는, 기본소득과 자동화 기술이 결합할 때 오히려 경제를 더 정제되고 건강하게 만든다. 우리는 더 이상 생산량의 총합으로 경제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의 경제는 '진정성의 밀도'로 측정되어야 한다. 게으름은 무너짐이 아니라 정화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