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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이아데스 Sep 01. 2023

벽시계의 자유

벽시계 바늘이 움직이지 않았다. 전원생활을 병행하느라 아파트의 시계가 멈춘 줄 몰랐다. 건전지를 찾다가 시계를 쳐다보니 다시 째깍거리며 간다. 다음에 와서 교체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시골살이의 재미에 빠져 아파트 관리에 한동안 무심했다.

며칠 뒤, 아파트의 문을 열자마자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거의 12시를 가리키며 시곗바늘이 멈춰 있었다. 탁자 위에 준비해 뒀던 건전지를 집었다. 고요한 거실에 시계와 내가 마주 섰다. 수많은 확률 중 12시 부근에서 멈추다니. 신기했다. 30년 동안 쉼 없이 움직이던 물건. 시침, 분침, 초침, 세 개의 바늘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만나고 헤어지는 숙명의 영원회귀가 끝난 것 같았다. 네가 멈춘 게 정오였을까, 자정이었을까. 12시라는 야누스의 얼굴. 기분이 이상했다. 오전과 오후, 어제와 오늘의 경계, 그리고 낮과 밤의 한가운데서 자유를 달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시계가 측은하게 보였다. 인간의 시간을 살아주느라 정작 자신만의 시간은 없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이 생각났다. 앤디와 레드, 두 사람. 교도소 생활 속에서도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온전히 즐기는 앤디. 단 몇 분 동안이지만 완벽하고도 진정한 자유를 만끽한다. 그리고 그는 탈옥을 위해 20년 동안 감방에서 구멍을 뚫는다. 마침내, 탈출 장면에서 ‘인간은 살아있는 한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모험을 통해 자유를 찾은 앤디와는 달리 레드는 가석방으로 쇼생크 감옥을 나온다. 하지만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책임지는 자유를 오히려 두려워한다. 오랫동안 수동적인 삶에 익숙해져 있던 그는 자유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삶을 포기할 결심까지 한다. 권리와 책임이라는 자유의 두 가지 측면에서 두 배우의 명연기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자유가 싫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고등학교 시절, 야간자습 감독 선생님에 대한 정보는 중요했다. K 선생님은 우리 마음을 잘 이해해 주는 인기 많은 젊은 선생님이셨다. 그 선생님 담당인 날에는 어김없이 도토리만 한 자유를 추구했다. 화장실 다녀온다고 허락받고선 운동장에서 보름달을 즐겼고 친구는 간식을 위해 근처 가게를 살짝 다녀오기도 했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수업 대신 가을비에 젖는 아슬아슬한 자유도 누렸다. 또 어느 날은 부모님께 둘러대고 교정에 앉아 밤늦게까지 금지곡을 불러댔다.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어떻게 보면 구속이라는 게 있어 자유가 더 짜릿했고 더 열렬히 추구했다. 그리고 어떤 시간은 천국과도 같은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세월이 흐르고 삶이라는 것이 자유를 통해 무언가를 성취해 가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다. 자유 앞에는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었고 선택은 언제나 자신의 몫이었다. 행복도 누렸지만, 그로 말미암은 책임과 후회도 많았다. 영화에서 앤디가 자유를 즐긴 대가로 2주간의 독방 생활을 했듯이 나 역시 보름달에 취해 있는 동안 공부하지 못했다. 결강이나 캠퍼스 낭만을 즐기느라 학점에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책임감 없는 자유가 인간관계 속에서 타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도 있다. 물론 대부분 사람은 자유 안에 들어있는 권리와 동등한 책임감의 무게를 느낀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자유는 방종을 넘어서 폭력이 될 수도 있다. 개인의 자유가 함께하는 공동체에 손해를 끼친다면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아닐 것이다. 


벽시계를 다시 바라보았다. 붉은색 초침이 여전히 정지해 있다. 시간이 멈추고 난 뒤 찾은 자유. 절제되어 본질만 남아있는 그의 자유가 이 공간을 가득 채운 듯했다. 아니, 이미 영원으로 들어가 버린 것 같았다. 

벽시계 속에 푸른빛 추억과 사랑, 깊은 슬픔, 그리고 소망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리고 너에게 말을 건다. 자유가 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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