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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이아데스 Sep 05. 2023

거미의 시간

“이리 와 봐.” 

눈을 비비며 아들이 무슨 일이냐며 다가왔다.

새벽에 내린 빗방울이 난간 거미줄에 걸려 다이아몬드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야, 멋지네.”


마당에 거미가 부쩍 많아졌다. 외형도 그렇지만 먹이를 잡기 위한 덫이라는 생각에 거미줄이 보기 싫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어김없이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대나무 작대기를 들고 길게 이어져 있던 그 끝을 끊었다. 여기저기 있는 그것들을 없애는데 시간을 좀 보내고 나서야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검색해 보니 집에 있는 거미 대부분은 호랑거미 종류였다. 


다음 날 아침, 방울토마토 지지대가 기울어져 있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디딤돌에 발이 닿는 순간, 거미줄이 얼굴에 걸렸다. 화가 났다. 엉켜있는 줄을 떼어내면서 고개를 돌리는데 어제 제거한 그 거미줄이 그대로 재현된 것을 목격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거미는 보란 듯이 배롱나무와 월계수 사이에 3m나 되는 극세사 줄을 또 만들었다. 잎 끝에서 가느다랗게 뻗어 나온 줄은 몇 개가 겹쳐져서인지 햇살 아래 황금색으로 보였다. 거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배롱나무 쪽에 가만히 있었다. 보기에도 징그러운 8개의 다리를 쫙 편 채 말이다.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작대기로 다시 한번 나무 사이에 걸쳐져 있는 줄을 끊어버렸다. 거미는 약간 움직이는가 싶더니 배롱나무 잎 뒤쪽에 붙어 꼼짝하지 않았다. 


또 하루가 지났다. 일어나자마자 거미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거미줄은 새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잘 움직이지 않던 이 녀석이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햇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인상을 쓰고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눈대중으로 봐도 백 개가 넘는 세로줄을 이미 완성해 놓은 뒤였다. 그리고 뒤쪽의 두 다리를 이용하여 부지런히 가로로 줄을 내고 있었다. 도대체 저 줄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신기했다. 거미에 대한 비밀을 모조리 캐내려는 듯 한참이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짜증은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거미의 행동에 몰입하고 있었다. 나의 시간은 물론이고 거미의 시간도 멈춘 것 같았다. 오로지 그 일에 집중하고 있는 거미를 보면서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거미와 같은 자세를 취해보려고 몸을 비틀었다.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거미는 쪽빛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그저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이 녀석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내가 한심했다. 불편함 때문이지 딱히 거미가 해로움을 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모기, 파리 등 해충을 잡는다고 옆에 있던 아들이 넌지시 말을 던졌다. 단 며칠 만에 거미에 대한 생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났다. 그렇게 혐오스러웠던 거미가 이렇게 경이로운 대상으로 바뀌다니. 


며칠 동안 거미의 생활을 보며 하루를 시간, 분 단위까지 쪼개어 사는 나를 되돌아보았다. 시간이 빨리 간다느니, 시간이 없다느니, 연신 시계를 보며 쫓기듯 살고 있는 내가 아니었던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사는 거미가 훨씬 자유롭고 지혜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행복을 꿈꾸며 자연 속에서 살아간다고 으쓱대면서도 여전히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은 거미한테 한 수 배웠다. 


바야흐로 거미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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