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EON Mall의 후추에서 보다
지난 11월 13일, 캄보디아 프놈펜 샹그릴라 호텔에서 열린 한‧아세안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공식적으론 트랙 2 회의였지만, 아세안 고위인사들이 개인 자격으로 다수 참석해 사실상 ‘트랙 1.5’ 수준의 회의였다.
캄보디아는 여러 차례 방문한 익숙한 나라다. 다만 최근 일부 한국 청년들이 온라인 사기 사건에 연루되며 현지 치안 우려가 커진 탓에, 이번엔 호텔 밖 외출을 자제했다. 대신 객실에서 메콩강과 프놈펜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며 옛 추억을 떠올렸다. 그러던 중 동행한 MZ세대 일행에게 “캄보디아 특산품은 후추”라고 말하자, 모두 흥미를 보여 심포지엄 종료 후 만찬 전 1시간을 내어 인근 AEON Mall을 찾았다.
사실 내 목적은 단순한 쇼핑이 아니었다. 일본 기업의 현지화 전략, 즉 지산지소(地産地消) — 현지인 취향과 소득 수준에 맞춰 현지에서 생산하고 판매하는 구조-가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직접 보고 싶었다.
AEON Mall 1층 슈퍼마켓의 후추 진열대에는 흰색, 적색, 검은색 후추가 다양하게 놓여 있었다. 나는 10여 개를 구입했고, 현지 화폐 리엘(Real)과 함께 통용되는 미 달러로 결제했다. 일행 중 일부는 신용카드 결제가 되지 않아 애를 먹었고, 나는 다시 한번 “동남아에서는 달러가 진정한 비상금”임을 실감했다.
일본의 동남아 재등장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프랑스 식민세력을 몰아내고 동남아 대부분을 3년 8개월간 지배했다. 초기에 ‘해방자’로 환영받았지만, 곧 자원의 수탈이 목적임이 드러나면서 혹독한 통치를 했다. 상식적으로는 전범국이자 가해국인 일본이 동남아에서 외면받는 것이 자연스러웠겠지만, 역사는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냉전이 시작되며 미국은 소련 봉쇄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진주만을 공격했던 일본이었지만, 전략적 계산 끝에 미국은 일본 부흥을 지원했다. 마샬플랜이 서독을 재건시킨 것처럼, 일본은 미국의 아시아 전략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이 공산화되자 미국은 일본에게 잃어버린 중국 시장의 대안으로 동남아 시장을 열어주었다. 일본은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제공된 자금을 자국 기업의 동남아 진출 종잣돈으로 활용했다. 1960~80년대 동안 일본은 동남아 전역에 공을 들였고, 특히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엔화가 급격히 절상되자, 일본 기업들은 생산기지를 대거 동남아로 이전했다. 그 결과 태국을 중심으로 자동차 산업 생태계를 장악했고, 전자제품 시장에서도 오랫동안 절대적 우위를 점했다.
필자가 90년대 말 인도네시아 근무 시절만 해도 고급 백화점 전자매장 중앙에는 소니와 파나소닉이 자리했고, 삼성과 LG는 구석에 있었다. 지금은 판도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 내연 자동차 시장은 여전히 일본이 강세지만, BYD 등 중국 전기차의 저가 공세가 거세고, 현대 아이오닉은 틈새시장을 노리고 있으나 쉽지 않다. 일본은 전기차 대신 하이브리드 기술로 친환경 시장에 대응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SEAS(동남아연구소)와 호주 로위연구소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2025년 기준 동남아 국가들이 가장 신뢰하는 외부 파트너는 여전히 일본이다.
일본의 신뢰가 지속되는 이유
그 배경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정책의 일관성이다. 일본은 전후 70여 년 동안 민주당의 단기 집권기를 제외하면 자민당의 장기 집권 아래 일관된 동남아 정책을 유지했다. 정권 교체 때마다 외교 기조가 흔들리는 한국과 대비된다. 한국에서 동남아는 여전히 ‘4강 외 지역’ 정도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둘째, 산·관·학 협력의 정착이다. 일본의 동남아 연구는 식민지 통치 시절부터 축적된 방대한 자료와 전문 인력을 기반으로 발전했다. 한국이 아직 ‘범용적 전문가(generalist)’가 많은 반면, 일본은 각 분야별 ‘전문가(specialist)’가 체계적으로 활동한다. 필자가 일본 근무를 자청했던 이유도 그들의 동남아 연구 생태계를 직접 보고 배우기 위해서였다.
셋째, 여론 지도층에 대한 장기적 접근이다. 동남아 각국의 중견 관료나 연구자들 가운데 일본 유학 경험자가 매우 많다. 이는 단순한 교육 교류가 아니라, 일본이 의도적으로 구축한 ‘친(親)일본 네트워크’의 결과다.
한국의 과제와 전략적 제언
우리도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 일본의 방식을 단순히 모방하기보다, 한·일 협력을 기반으로 ‘한·일·아세안 3각 협력 모델’을 발전시키는 것이 현실적이다.
캄보디아 프놈펜의 AEON Mall이 일본의 현지화 전략의 상징이라면, 베트남의 롯데백화점은 한국형 프리미엄 시장의 성공 사례다. 그러나 이제는 프리미엄 시장뿐 아니라 중산층을 겨냥한 실용형 유통망에서도 한국 기업이 존재감을 높여야 한다.
예컨대 AEON Mall의 후추처럼 현지 생산품을 단순히 내수용으로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외국인 관광객이나 제3국 수출 시장으로 확대하는 구상도 가능하다. 이는 단순한 상품 판매를 넘어, 현지 산업 생태계와 연계된 지속가능한 상생 모델로 발전할 수 있다.
현재 한·아세안 교역 규모는 약 2천억 달러 수준이지만, 한국의 대(對) 아세안 흑자 구조는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한국 기업이 현지에서 경쟁력 있는 상품을 생산하고 이를 역수입해 국내 소비자에게 합리적 가격으로 제공한다면, 소비자 후생을 높이는 동시에 교역 불균형을 완화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맺으며
프놈펜 AEON Mall의 한켠에서 본 흰 후추 한 봉지는 단순한 향신료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이 수십 년간 동남아와 쌓아온 신뢰, 그리고 일관된 전략의 결실을 상징한다.
한국이 진정한 동남아 협력 파트너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감각적 접근을 넘어 현지화·지속성·신뢰의 3박자 전략을 장기적으로 축적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