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쉬움을 만리향으로 채우며
며칠 전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공원 건물 사이에서 손님을 맞던 마리골드가 순식간에 시들어 뽑혀 나갔다. 노랗고 주황색의 꽃자리는 휑하다.
마리골드가 뽑힌 빈공간
꽃도 때가 되면 떠난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그 자리를 마주하니 괜히 허전하다.
어차피 시를 다한 것이니 자연스러운 순환이라 스스로를 설득해 보지만,
생로병사의 인간사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아 마음 한켠이 묘하게 비어 온다.
마리골드가 있던 다른 자리는
꽃배추를 심고,
겨울이 되면 예산 사정상 이렇게
그냥 빈 공간으로 둔다고 한다.
작년 이맘때도 분명 그랬을 텐데
아마 나는 눈치채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쳤을 것이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공원을 걷다 보니
입구 근처에서 금목서가 진 뒤
이어서 피어난 은목서가 눈에 들어온다.
공원 입구 금목서 금목서 군락
하얀 꽃에서 짙은 살구향이 풍긴다.
금목서는 황금빛 꽃으로
보통 10월쯤 참배객을 맞이한다.
금목서와 은목서의 향은
예로부터 향수의 재료가 될 만큼 깊고 오래 남는다.
그 향이 좋아
얼마 전 공원 입구에 있던 동백나무 대신 금목서 군락을 조성했다.
내년 10월이면
황금빛 금목서 향이
유엔묘지를 찾는 이들을
조용히 맞아줄 것이다.
묘지 안쪽으로 더 걸어 들어가
보행 주도로를 따라가면
최연소 안장자인
17세 호주 병사의 이름을 '도운트 워터웨이(Daunt Waterway)’가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심어진 나무들 사이로
지금 한창때인 만리향이 있다.
공식 명칭은 구골나무.
자스민을 닮은 향이
지나는 사람의 발길을 붙잡는다.
도운트 수로의 만리향 길
나도 무심히 지나가다
하얀 꽃 가까이 코를 대고
잠시 멈춰 서게 된다.
그 향이 너무 깊고 부드러워
저 멀리까지 간다 하여
사람들은 이 꽃을 만리향이라 불렀다.
세상살이에 지친 분들이
지금 잠시 숨 고르기가 필요하다면,
이 만리향 향기처럼
말없이 스며드는 위로가
마음속 어디쯤 닿았으면 좋겠다.
큰 위로가 아니어도 괜찮다.
지나가다 문득 맡은 향기 하나로
“그래도 오늘은 견딜 만하다”
그렇게 느낄 수 있다면 충분하다.
부산 인근에 계신 분들은
직접 와서 이 향을 맡아보셔도 좋겠다.
다만 만리향은 보름 남짓,
아주 짧게 피었다가 조용히 떠난다.
지금은 끝물이다.
조금 서둘러야 한다.
떠난 마리골드의 자리는 비었지만,
그 빈자리를
만리향이 조용히 채우고 있다.
삶도 어쩌면
그렇게 이어지는 게 아닐까,
나는 오늘도 그 향 속을 천천히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