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75년의 시간
어김없이 봄은 온다.
그리고 봄은 늘 전령을 먼저 보낸다.
춘삼월, 꽃이 피는 계절은
긴 겨울을 견딘 자연이 기지개를 켜고
사람들을 밖으로 불러내는 유혹의 시간이다.
작년 이맘때도
목본의 나무와 초본의 꽃들이 피었겠지만
지금 이 풍경은 내게 또 새롭게 다가온다.
유엔기념공원의 가장 이른 봄은
1월부터 피기 시작하는 홍매화다.
홍매화 벚꽃
흰목련
자목련 동백나무 명자나무
그 꽃이 지면
여러 곳에서 흰매화가 이어서 피어난다.
벚나무도 저마다 다르다.
위로 곧게 피는 꽃이 있는가 하면
능수버들처럼 가지를 늘어뜨린 채 피는 모습도 있다.
처진 개벚나무는 하얀색 분홍색 꽃이 지금 피는데
능수 버들은 전쟁 시기 활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호국’이라는 꽃말이 이곳 유엔묘지와 잘 어울린다.
처진 개벚나무
능수 버들
24개 국기가 휘날리는 상징구역 뒤편에는
흰목련이 먼저 피고
뒤이어 자목련이 그 자리를 채운다.
겨울을 견딘 동백나무도
여전히 꽃을 피운다. 공원 한구석 켠 매화나무 군락 아래 보라색 광대나물도 피어난다. 이 야생화, 얼마나 이쁜가.
한 줄기에서 흰 꽃과 붉은 꽃이 함께 피는 모습도 보인다.
서로 다른 색이 한 몸에 공존하는 풍경은
이곳의 역사와도 닮아 있다.
봄은 나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참배객 의자 뒤 화분에서는
보라와 노랑이 섞인 펜지가 다시 피어난다.
꽃양배추도 싱싱한 색을 유지하며
봄볕 속에서 생기를 더한다.
펜지 꽃양배추
광대나물
막 식재한 금잔화, 오른쪽 내 엄지
그 뒤를 이어
온실에서는 석죽, 마리골드, 페투니아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성급한 금잔화는 이미 곳곳에 식재되어
봄의 첫 자리를 차지했다.
붉은 서부해당화와
순백의 능수복숭아도
곧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3월의 이 준비는
곧 4월의 절정으로 이어진다.
4월이 되면
금잔화, 석죽, 페투니아, 마리골드가 초본의 색을 채우고
모란, 벚꽃, 해당화, 능수복숭아가 목본의 풍경을 완성한다.
유엔기념공원의 봄은 그렇게
시간을 따라 층층이 피어난다.
그리고 올해 4월 6일,
유엔기념공원은 조성 75주년을 맞는다.
이를 기념해
작지만 의미 있는 행사가 열린다.
콜롬비아와 에티오피아의 고급 원두를 블렌딩해
‘참전국 커피’ 75잔을 만들어 주요 인사들과 나누고,
일반 방문객에게는 300잔의 커피를 제공한다.
75년 전,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름 모를 나라로 향했던 젊은이들.
그들의 길을 따라온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우리는 그들의 희생과 기여를 다시 기억한다.
이번 행사에서
부산 Better Monday Coffee 그룹과 협업해
한정판 참전국 커피를 나눈다.
부산 커피 문화의 깊이도 함께 전하는 자리다.
또 하나의 시간도 펼쳐진다.
유엔기념공원 초기,
유엔사령부 관리 시기(1951~1959)의
미공개 희귀 사진 20여 점이
야외 특별전으로 공개된다.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며
75년 전 이곳의 시작을 걸어볼 수 있다.
꽃을 보고,
커피를 마시고,
역사를 만나는 시간.
세 가지 경험이 한 공간에서 만난다.
올해 4월,
유엔기념공원의 봄은 조금 더 특별하다.
두 손 벌려 맞이하는 꽃들 사이에서
우리는 기억을 마주하고,
평화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