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의 세상 풍경
작년 말 겨울이다. 시내 호텔서 정책자문 회의가 있어 외출한다. 오랜 직장 생활에서 은퇴한 이후 노타이와 운동화 차림을 고집해 그간 입던 양복도 다버렸다. 그러나 혹시나 해서 지난달 양복을 한벌 샀다.
구두는 신던 것을 신으려고 했는데 신자고 보니 뒤가 헤어져 아무래도 새로 사야 싶어 광화문 정부 청사 뒤에서 수십년간 구두를 닦으며 수제 구두를 만드는 단골 구두방 아저씨를 찾았다.
구두방이라고 해야 반듯한 가게가 아니라 정부 청사 뒤 길가에 손님 한 명이 겨우 앉을 만한 크기의 박스형 구두방이다. 찌는 여름이면 소형 선풍기에 더위를 식히고, 한겨울엔 손난로로 추위를 견디며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사는 분이다. 노인의 고단한 노동과 자발적 집콕의 젊은이들의 현실을 생각한다.
그 분이 반갑게 맞아 줘 나도 잘 지냐냐 물었더니 6개월전 폐암이 걸려 폐 반쪽을 없애고 치료 중인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계속 일한다고 한다.
큰 딸과 쌍둥이 두딸 근황을 물었더니 한숨을 푹쉬며 쌍둥이 딸들은 벌써 41살인데 직장없이 집에 있단다. 그 중 한명은 장애가 있어 졸업 후 취직 한번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벌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을 덧붙이며 내 사이즈를 찾아 준다. 이제 10만원이라고 한다. 하기야 20년 전에는 3만원 정도 했으니 단골인 나에게 조금 미안하기라도 한 듯 얘기한다. 이 집 구두 단골인 나는 서울서는 그의 수제 구두만 신는다. 구두 앞쪽이 광이 반짝 반짝나 내 얼굴이 보일 정도다. 신발도 여간 편한게 아니다. 언젠가 자기 구두를 대기업과 손잡고 출시한다고까지 얘기했을 정도다. 그것도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나에게 은퇴 후 어디 있냐 물어 어디 나간다고 하니 부러운 듯 말한다. "은퇴 후에도 일하시는 군요"한다. 괜시리 미안한 마음에 "예" 라고 말꼬리를 흐리며 요양 잘 하시라는 말만 남기고 나왔다.
겨울비가 반짝이는 구두에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진다. 구두방 아저씨의 고단한 눈물처럼 여겨져 애꿎은 비 탓을 하며 회의 장소로 갔다. 시내 한복판 호텔에는 중년의 아줌씨들이 니 비싼 가방 비 맞아 어쩌니 저쩌니 하며 송년회인지 호텔 식당으로 무리지어 간다. 그네들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구두방 아저씨가 생각났다.
동서고금 세상은 늘 이랬다.
2025.2.6 다시 구두방 아저씨를 찾았다. 그는 나보다 10살 위인 73세다.
모처럼 구두에 광을 내려고 들어갔는데 사람이 그리웠는지 구두광이 반짝이는데도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쌍둥이 두딸은 물론 밖에서 따로 사는 큰딸과도 구정이라고 한자리에 모여 밥한끼 못했다고 한다.
같이 사는 두딸은 한방을 쓰는데 방에에서 블루스타에 컵라면 세끼를 끓여먹고 방을 나오지 않고 아빠는 일체 말을 섞지 않는다고 한다. 전형적인 고립 은둔형이다.
2023년 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이런 청장년들이 24만명에 달하고 경제손실만 따져도 6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런 경재적 계산을 넘어 사회적 손실은 엄청나다.
내가 아빠와 딸들은 사이가 좋은데 왜 그러냐고 묻자 15년전 엄마가 세상을 일찍 떠난 것이 아빠 탓이라고 생각해서 그런다고 한단다.
이제 폐암 4기이고 머리까지 먼저 현재 먹고 있는 약의 내성이 8개월 정도 밖에 안남아 언제 죽든 시간 문제라고 한다. 하지만 세상을 등지고 사는 딸들을 남겨두고 가는 게 걱정이 많이 된다고 한다. 구두값이 5천원이라고 해서 더 현금이 있으면 만원 한장을 더 주려고 했는데 지갑에 8천원 밖에 없어 그것만 주고 나왔다. 무거운 발걸음이다.
1862년 빅토르 위고가 프랑스대혁명 후 프랑스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한 소설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 불쌍한 사람들)'의 주인공인 '장발장'(배가 고파 빵 한조각을 훔쳐 19년 징역을 살고 나와 한 신부의 도움으로 정직한 사람으로 된 인물) 못지 않게 정신적•물질적으로 소외된 현대판 장발장이 우리 주위엔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