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유기농 겨울 오이를 재배하는 동생의 비닐하우스를 다녀왔다.
근처 부모님 선산에 가려고 하루 일찍 함창에 왔다. 오이 따기 전에 회룡포 노래로 유명한 삼강이 흐르는 삼강 주막에서 주모 세트인 막걸리+배추 전+파전에 시골 칼국수를 배불리 먹으며 추억의 고향 맛을 찾았다.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엄마가 솥뚜껑을 뒤집고 전을 부칠 때 옆에 앉아 달래 간장에 찍어 먹던 그리운 엄마 맛이다. 동네 아줌씨들이 전통 비법 그대로 살린 솜씨라고 한다. 하여튼 맛있었다.
동생은 서울 명문대 화학과를 나와 대기업 실험실 연구직 과장까지 지내다가 화학 약품에 몸이 안 좋아 고향 근처로 15년 전에 귀농했다. 화학 제품에 대한 몸의 이상 신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기농 겨울 오이 재배를 시작했다. 일체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 농법이다. 무슨 대단한 친환경 의식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몸 때문에 시작한 유기농 농법인데 전국에서 이 분야에서 유일한 농군이다. 세상사가 다 계획대로 되지 않나 보다.
나도 아침에 도움이 될까 싶어 오이 따기를 도와준다고 하자 동생은 한사코 말린다. 그럼에도 내가 우기자 따야 할 오이 견본을 주며 하우스 오이 한 이랑을 따보라고 한다. 한 바구니에 100개 정도 들어가는데 굵은 놈 위주로 20개를 골라 땄다. 옆 이랑에서 오이를 딴 동생 바구니는 꽉 찼다. 동생이 내가 땄던 이랑을 다시 따는데 뒤따라가며 보니 싹수가 없는 놈은 따서 버리고, 아얘 진드기가 붙은 줄기는 정리하면서 오이를 따는 솜씨가 전문가 수준이다. 한 바구니를 꽉 채웠다. 돈으로 따지면 나는 2만천 원어치만 딴것이다. 나 같은 초보자가 도와준다고 오이 따면 십중팔구 적게 따거나 아니면 상품 가치가 없는 놈들을 따 손해로 이어진다는 말을 한다. 또 어차피 초보자가 딴 이랑은 자신이 다시 따야 하니 일도 많아지기 때문에 초보자 체험이 별로란다. 하기야 선무당이 사람 잡긴 한다.
오이 따기가 쉬워 보이지만 이것도 몇 개월은 배우고 실수를 해야 된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들으니 어느 일이든 다 그렇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뇌리를 스쳐갔다. 머리의 생각과 현실 간 괴리가 일어나는 순간이다.
또 내가 겨울 오이는 겨울에 심어 놓고 통상 4월 경까지 5~6개월 정도만 일하고 나머지 6개월은 노니 참 좋겠다고 하자, 동생은 보기엔 그렇지만 실제로는 6개월 동안은 휴일 없이 주 7일을 일하고, 나머지 반년에도 다음 농사를 위해 물을 데 벼를 심고 엎어 거름을 만들어 좋은 토양을 다시 만드는데 많은 품이 든다고 한다.
그래도 요새 60살이면 정년이고 전문가들도 은퇴 후 5년 정도 일하는데 오이 농사는 제 몸 관리만 잘하면 70~75살까진 하겠다고 하니, 동생이 그건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시설이 없고 갈 곳이 딱히 없는 시골에서 일만 오래 하는 것도 좋은 것만은 아닌 듯싶기도 했다.
동생은 농사짓고 나서부터 몸무게도 줄고 건강해져 귀농을 잘해다 싶다. 하지만 겉만 보고 오이 재배는 차치하더라도 오이 따기 정도는 아무나 하는 거 아닌가 했는데 이 또한 전문가의 영역이다. 세상일이 다 그렇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