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 황규관의 김수영
2023. 10. 31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기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는
열렬하다
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 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 – 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문단의 후배 중 몇 안 되는 시인이 있다. 황규관이 그렇다. 최근들어 황규관이 해방기의 시인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김수영을 열독하더니, 심지어 그에 관한 두 번째 평론집을 내놓았다. 제목이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거다》이다. 일단 제목만으로도 눈에 확 띄는 이 평론집은 같은 시인을 다룬 《리얼리스트 김수영》의 연장선이라기보다는 더 깊고 더 숙고한 진화된 버전이다.
시인을 시인을 평론하는 이 멋진 일을 두 번이나 해내다니. 그것도 신작 평론집은 훨씬 두터워졌다. 이 평론집을 받은 후, 내 독서습관과는 다르게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열독했다. 이 열독의 층위는 젊은 시절 내가 이해한 김수영, 그리고 시인인 황규관이 이해한 김수영, 이 둘을 넘어 새로 이해하게 된 김수영의 3층 구조를 띄고 있다. 자유의 시인, 혁명의 시인을 지나 생활 속에서 자신을 혁명하는 시인에 이르기까지 내 독서여정은 중층적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책의 마지막 쪽을 덮었다.
책의 제목은 김수영 시의 최고봉이자 절정에 해당하는 <사랑의 변주곡>의 시행에서 따온 것이고, 황규관 시인은 그 절정에 도달하기까지의 김수영의 시들을 역사적 시간대에 맞추어 차분하고 깊이 있고 친절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 평론집은 비단 김수영 시인의 삶과 문학뿐 아니라,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작가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글을 써야 하는지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적 글쓰기의 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책읽기가 교양을 너머 성찰과 삶의 변화까지 도달해야 함을 낮은 목소리로 제시하고 있다.
페북을 보니 이미 여기저기로 황규관 시인이 불려 다니는 것 같다. 내가 있는 고양시에도 한 번 초대하여 그의 목소리를 통해 울리는 쟁쟁한 김수영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아울러 김수영을 사랑하거나, 알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주저함 없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만약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분명 독서의 기쁨에 미쳐 날뛰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