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시간적으로는 10월 31일 화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아침에 가파도에서 매표소 직원을 하는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 잘 지내시죠?"
"아, 그럼요. 그런데 무슨 일로."
"혹시 가파도에 오실 수 있나요? 매표소 직원을 뽑거든요."
"언제요?"
"10월 말이 계약만료니까 11월부터 일할 수 있어요."
전화받았던 날이 10월의 마지막 날이었으니까, 내일부터 일할 수 있다는 말? 나는 가파도 한 달 살기를 마치고 떠나면서, 혹시 매표소에서 직원을 뽑으면 나한테 연락하라고 지나가듯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니, 당장 내일 오란다고 내가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일이 있으면 미리 연락을 해주시던가 해야지. 이렇게 갑작스럽게 연락을 하면 답을 주기가 곤란하네. 며칠 말미를 줘요. 그런데 자네는 매표소 직원을 그만두려고?"
"아니 내년도부터 더 괜찮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하려고요."
"그러면 내가 자네 보조가 아니라, 대타가 되는 건가? 풀타임으로?"
"그렇죠. 그런 셈이죠."
가파도 직원하고 친해지면서 나이 차이가 많이 나, 언제부턴가 존댓말 반 반말 반을 섞어 쓰고 있다. 그만큼 친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며칠 말미를 주게. 일단 아내에게도 물어봐야 하고, 여기서 정리해야 할 일도 있고. 다시 전화함세."
전화를 끊었다. 그날 저녁 아내에게 말했더니, 아내는 괜찮은 기회라며, 인생의 전환기에 한 번 모험을 해보는 것에 찬성을 한다. 아이들도 찬성. 가족과 함께 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나 혼자 내려가는 건데 집안 식구는 태평하다. (아니, 날 믿는 거야? 치우고 싶은 거야? 이 근거 없는 신뢰감은 뭐지?) 모험을 주저하게 하는 가장 큰 산을 훌쩍 넘었다. 나만 결단하면 된다.
아파트에서 내려와 담배를 한 대 물고, 가파도 직원에게 전화를 한다.
"난데, 진행하세. 우선 정말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하게 될 경우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는지 알아봐 주게."
"일단 집을 구하시고, 주소지를 가파도로 옮기시면 되고요. 조속히 내려오셔서 직접 당사자들과 대면을 하셔야죠."
"집을 구하는 문제나, 면접이나 집계약문제는 자네에게 맡기겠네. 일정을 잡아주게."
"그런데 오시게 되면 얼마쯤 있으실 생각이신가요? 너무 짧으면 회사에게 곤란해할 것도 같은데."
"가면 집 계약도 연세로 내야 하고, 적어도 1년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죠. 그럼 자세한 사항은 제가 더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고맙소. 하루에 한 번씩은 통화하세."
11월 1일, 다시 곰곰 생각해 본다. 내가 잘한 결정인가?
가파도에서 한 달 살고 올라오면서 다시 가파도로 가게 된다면 한 1년 정도는 살아야 , 그래서 춘하추동 4계절을 다 지내봐야 가파도를 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언제 올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런 기회가 온 것이다.
물론 정리해야 할 일이 많다. 밀린 원고도 지금 열심히 써야 하고, 정기적으로 잡혀있는 강좌나, 이미 잡혀 있는 도서관 특강, 그리고 3개월마다 정기적으로 해야 하는 병원방문, 그리고 고양시에 머물면서 내년도에 해야 할 계획들도 다 다시 형식과 내용과 일정을 조정해야 한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일이 진행돼도 되나? 그럼 매주마다 다니는 젬베수업은, 일요일마다 참석한 교회는? 주말 농장은? 갑자기 아무런 생각 없이 했던 모든 일들이 다 특별한 일인 것처럼 떠오른다. 단순하게 산 것 같았지만 꽤나 복잡하게 삶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은 가파도로 가게 되면 취소되거나, 축소되거나, 변형될 것이다. 그래도 괜찮나? 아, 그리고 운영하고 있었던 사무실과 작업실은 거기에 있는 책들은? 아이고, 내 인생 가볍지 않구나. 어쩌지?
11월 2일. 생각은 복잡했지만, 마음은 '가보라고, 한 번 해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지금 아니면 언제?'라고 묻고 있었다. 그래, 이번에는 나의 마음을 따라가 보자. 어려운 일, 힘든 일도 있겠지만, 나를 믿어보자. 그리고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과 새로 만나는 사람들을 믿어보자. 떠나보자. 그리하여, 계획에도 없었던, 그러나 무의식적으로는 간절히 바랐던 가파도 1년 살기의 예고편이 시작된 것이다. 11월에는 적응기, 12월부터는 본격취업과 정착기가 시작되겠지. 일단은 가겠다는 생각만 하자. 정리문제도, 이사문제도, 생활문제도, 직장문제도 하나하나 만나면서 차근차근 해결하자. 떠나는 거다. 자립하는 거다.
항공편을 확인해 11월 8일 오전 7시 제주행 비행기를 끊었다. 이날 선주회사에 들러 매표소 직원 면접을 볼 것이다. 그리고 가파도로 들어가, 1년 동안 살집을 알아보고 하룻밤 지나고 나서 11월 9일 날 다시 고양시로 올라오기로 계획을 잡았다. 가파도행 첫걸음을 걸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