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은, 우리가 '성찰'과 '사유'를 한다면 허구임을 깨달을 수밖에 없는 '자아정체성'이라는 감각을 계속 지니게 해 준다. 세상 속에서 행동하고 움직이고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을 견고하고 실질적인 개체처럼 느낀다. 행동은 우리가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위안을 준다. 현실에서 도피하는 사람은 게으른 몽상가가 아니라, 무의미한 존재의 피난처를 구하기 위해 '행동하는 삶'을 살려는 사람이다.
오늘날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좋은 삶은, 과학과 기술을 한껏 활용하되, 그것이 우리에게 자유롭고 합리적이며 온전한 정신을 주리라는 환상에는 굴북하지 않는 삶이다. 평화를 추구하되, 전쟁 없는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은 갖지 않는 삶이다. 자유를 추구하되, 자유라는 것이 무정부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에서 잠깐씩만 찾아오는 가치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다.
좋은 삶이란 진보를 꿈꾸는 데 있지 않고 비극적인 우연성을 헤쳐나가는 데 있다. 우리는 비극의 경험을 부정하는 종교와 철학에 길들여져 있다. 우리는 '행동'이 주는 위안에 기대지 않는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아니면, 너무 무식하고 게을러서, 그런 삶을 꿈꾸지도 못하는 것일까? (245~246쪽)
《고양이 철학》을 읽고 매료된 존 그레이의 다른 저작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를 읽었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Straw Dogs: Thoughts on Humans and Other Animals》이다. 'Straw Dogs'는 노자에 나오는 용어인 '추구(芻狗)'의 영어번역이다. 노자 <도덕경> 5장의 앞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천지는 어질지 않다. 만물을 지푸라기 개처럼 여긴다.(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유교의 인문학적 가치인 인(仁)과는 대조적인 노자의 자연주의적 가치인 불인(不仁)을 강조하는 용어를 책의 제목으로 삼았다는 것은, 존 그레이가 노장사상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노장사상에 입각해 세상을 보겠다는 선언이라고 할 수있다. 서양사상가인 존 그레이는 어떻게 노장철학을 이해하고 있는지, 그의 눈으로 본 현대철학과 현대세계는 어떠한 지 사뭇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책 전체에 대해 압축적으로 소개한 알라딘의 안내문을 따라가 본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환상》의 작가이자 방대한 철학적 문제제기를 짧은 문장 안에 밀도 있게 담아내는 것으로 유명한 존 그레이의 신작. 이번 책에서도 철학과 과학, 종교 경전과 문학 작품을 종횡무진하는 가운데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과 J. G. 발라드의 묵시론적 세계관, 그리고 장자의 ‘나비의 꿈’ 등에서 얻은 영감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의 원제인 ‘지푸라기 개 Straw Dags’는 고대 중국인들이 제사를 지낼 때 신에게 바치기 위해 만든 희생물이다. 이 개는 제사가 끝날 때까지는 최고의 예우를 받았지만 제사가 끝나면 내팽개쳐졌다. 존 그레이는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인간의 오만과 편견이 지구를 위협하고 있으며 이를 자정하지 않으면 가이아가 자정 능력으로 인간을 ‘지푸라기 개’처럼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저자는 반휴머니즘의 편에서 인간을 성찰한다. 인간은 ‘하찮은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 약탈하는 자)’일뿐이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외면하고 싶지만 외면할 수 없는 인간과 세계에 관한 진실을 마주하자는 것이다."
우선 난 존 그레이의 글쓰기가 마음에 든다. 장황한 설명보다는 간략하고 직관적으로 치고 빠지는 파이터적이고 잠언적 글쓰기가 그의 장점이다. 이 책은 그러한 단상들의 모음집이다. 이러한 짧고 압축적인 글쓰기가 가지는 불친절을 지적하거나, 치밀한 논리적 탐구가 부족하다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잠언적 글쓰기의 장점은 독자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그 빈 공간을 채우게 한다는 점이다. 한 권의 책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질문과 공격에 적절히 반응하고 방어하면서,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면서 저자와 더불어 책에서 다루는 다양한 이야기에 공동저자가 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반응하는 독서'라 말할 수 있는 이러한 독서법은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독서'로 가기 위한 필수단계이다.
결항으로 이틀을 쉬는 동안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던,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를 추천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절판으로 인해 중고로 구입하거나 도서관에서 대출받아야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좋은 책은 어떻게 해서라도 구입하여, 줄 쳐가며 자신의 생각을 여백에 적어가며 읽어보라고 권장한다. 중고가격을 보니 다행히 적절히 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