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들의 침묵

2023. 12. 26.

by 김경윤

침묵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행위로 보인다. 다른 동물들도 소음을 피하려고는 하지만 그것은 외부의 소리를 피하려는 것이다. 인간만이 자기 머릿속의 소음을 침묵시키고 싶어 한다. 내면의 소리에 진력이 난 인간은 자기 생각의 내는 소리를 없애기 위해 침묵에 기댄다. 그러나 인간이 침묵을 추구하면서 찾고자 하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소음이다.

침묵을 수련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의 제도들은 이런 소음으로 가득하다. 교회가 조용해지는 것은 텅 비어 있을 때뿐이다. 심지어 텅 비어 있을 때도 조용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결코 끝나지 않는 불쾌한 소음을 남겨 놓는다. 단조롭게 재생되는 인간의 일화들이 지루한 메아리로 남는 것이다. 폐허가 되어 유적으로 남아있는 교회들에서는 이러한 소리들이 서서히 사라진다. 특히 아주 오래전에 폐허가 된 교회에서 더욱 그렇다. 풍파에 손상된 교회는 현재 신도들이 모이는 교회가 갖지 못한 종류의 침묵을 가지고 있다.

- '동물들의 침묵' 중에서 (179~180쪽)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많은 분들은 음주가무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겠지만, 나는 그전에 기상악화로 연일 쉬었던 아르바이트비를 벌충하고자 계속 매표소에서 근무를 했다. 가파도 내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인이 8명이 있는데 - 그중 4명은 외지인들이다. - 교세가 미미해서 그런지 크리스마스 분위기라고는 1도 없는 곳이 가파도다. 생애 처음으로 트리 없는, 캐럴 없는 크리스마스를 홀로 보냈다.


하지만 그 기간이 심심했던 것은 아니다. 가파도로 와서 우연한 기회에 존 그레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그의 책이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하여 송악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대여해서 찬찬히 읽었다. 이번에 읽은 책은 《동물들의 침묵》이었는데, 부제가 '진보를 비롯한 오늘날의 파괴적 신화에 대하여'이다.

젊은 날 진보운동에 몸담아 왔고, 나이가 들어서도 진보진영의 일원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 책은 만만치 않은 도전거리를 제공하였다. 나이들이 노장사상을 접하고 나서 내 진보적 생각들이 조금은 상대적이 되고 유연해졌다고 하더라도, 존 그레이가 "유토피아는 집단적 기원의 꿈이다 그러나 그 꿈에서 깨어났을 때 발견하는 것은 악몽뿐."이라고 말했을 때, 매우 당혹스러웠다. 이 당혹스러움은 그동안은 내 반대 편에 대한 비판은 철저히 하면서도, 자신에 대한 비판은 부족했다는 반성으로 나를 이끌었는데, 시간이 두고 곰곰 생각해 봐야겠다.


좋은 책은 그 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너머 또 다른 책으로 나를 이끄는 책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이 책 역시 그런 점에서 좋은 책의 범주에 들어간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J. G. 발라드라는 작가의 이름을 처음 접했고, 검색해 보니 우리나라에서도 꽤 많은 소설이 번역되어 있었다. 조만간 그의 책도 대출하여 읽어볼까 계획 중이다.

《~~세계》는 지구종말 시리즈로 소개되어 출간되었다. 밸러드는 인간의 세상을 다른 시선을 조망함으로써 인간의 문명이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지는 지를 보여준다.

이번에 소개한 존 그레이의 책은 그전에 내가 소개했던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에 이어 읽으면 좋은데, 인간이 꿈꿔왔던 유토피아는 실현된 적이 없으며, 결국 인간은 타자와 자연을 약탈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좌우를 막론하고 인간이 자신이 꿈꾸는 세계가 현실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과학이 아니고 맹신이며 해로운 신화라고 존 그레이는 말한다. 그러한 유토피아적 꿈을 버리고 그가 택한 것이 현실주의인데 그것은 휴머니즘조차 버린 차원으로까지 생각을 이끈다. 문명 대 야만, 인간 대 자연이 아니라 '인간 동물'로서 인간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존 그레이는 회의주의의 극단이고, 반휴머니즘 사상가라 말할 수 있다.


예수 탄생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과 영생이라는 기독교 신화의 첫마디라 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읽은 책이 그에 대한 판타지를 제거하는 책이라는 점에서 시기상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나를 깊은 사유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손색이 없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추구(芻狗, Straw Do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