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의 시간

2023. 12. 30.

by 김경윤

비 잠시 쉬어가는 오후

달이 밥 주러 갔더니 제집에 들어앉아 꼼짝 않는다

고양이가 찾아와 제 밥그릇 움켜잡는데

달이는 먼 산만 바라본다

털이 젖은 냥이가 눈치도 안 보고 느긋하게 식사하는데

달이는 시치미 떼고 앉아 있다

제 것이 아니라는 듯


달이 밥그릇은 온 동네 밥

쥐들도 가끔 찾아오고 새들이 밥그릇 속에 들어앉아도

나는 안 보고 있다는 듯

먹다 싸우다 물고 가다 떨어뜨려도

나는 모른다는 듯

퉁퉁 불은 밥이 물그릇에 떠다녀도


달이가 바라보는 먼 산

안개가 산을 휘감는지

산이 안개를 붙들고 있는지

- 김해자, <먼 산> 전문



해자 누나에게 연락이 왔다. 주소가 어떻게 되냐고? 예전 주소가 바뀌지 않았냐고. 나는 가파도로 내려왔다고, 매표소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새로 주소를 찍어 달란다. 나는 메시지창을 열어 새로 바뀐 주소를 보내드린다.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로 67번길 10-14. 내가 가파도에서 묵는 곳이다. 창틈과 문틈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는 곳. 천정이 낮아 매번 머리를 찧는 곳. 그래도 전기매트 켜고 누우면 편하게 잠들 수 있는 곳. 없는 것 빼고 웬만한 것들은 다 있는 곳. 둘이 살기에는 살짝 비좁고 혼자 살기에는 넉넉한 곳. 문 열고 나와야 화장실을 갈 수 있는 곳. 주변에 폐가가 여러 채 있는 곳. 돌담 사이로 선인장이 열매를 맺는 곳. 길냥이들이 수시로 찾아와 밥 먹고 물 먹는 곳. 내가 새벽에 일어나 하늘을 보는 곳. 아침밥 지어 국에 말아먹고 출근하는 곳. 쏟아지는 별들과 노을이 아름다운 곳.


며칠 만에 해자누나의 신작시집에 왔다. 《니들의 시간》이라는 제목이 달려있었다. '니들'? 표제작을 찾아 먼저 읽어본다, "연하주 사는 우데게족은 / 사람 동물 귀신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니'라 부른다는군요. / 과거와 현재와 미래 안에 깃든 모든 영혼을 니로 섬긴대요." 아, '니'는 모든 존재를 말하는 것이로구나. 그렇다면 <니들의 시간>을 표제 삼을만했다. 내가 알고 있는 해자 누나가 딱 그런 사람이고, 해자 누나가 쓴 시가 딱 그런 시니까.


매표소에 앉아 발권을 하며 틈틈이 남는 시간에 시집을 읽는다. 읽다가 어느 순간 먹먹해져 먼 곳을 바라보게 된다. 칠칠치 못하게 눈물을 찔끔거리게 된다. 나이를 먹으니 눈물이 많아졌다. 풍경을 보다가도, 가만히 있다가도, 책을 보다가도, 시를 읽다가도 눈물이 흐른다. 해자 누나가 쓴 시들은 가슴을 먹먹하게도 하고, 낄낄대게 만들기도 하고, 한숨을 쉬게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해자 누나의 시 속으로 들어가 언제인지 모르게 동화되고, 착하고 순하게 살고 싶어진다.


많은 명시들이 있으나, 내가 선택한 시는 개와 고양이와 새들과 쥐들이 등장하는 <먼 산>이다. 아마도 늙었을 법한 개 '달이'의 모습은 해자 누나의 삶을 닮았으리라. 그리고 나도 닮아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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