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적으로 보면, 과학을 통해 불멸을 추구하는 것은 죽음을 격퇴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우연성과 신비성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다. 우연성은 인간이 항상 운명과 우연의 지배를 받으리라는 것을, 신비성은 인간이 알 수 없는 것들에 항상 둘러싸여 있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많은 이들에게 이런 상태는 견딜 수 없고 심지어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발전하는 지식을 이용해서 인간 동물이 인간 조건을 초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47쪽)
대체로 특이점 이론은 과정 신학Process Theology의 일종으로 파악할 수 있다. 볼셰비키 건신주의자들이 신격화된 인류를 상상했듯이, 많은 20세기 신학자들(주로 미국인)은 신이 인간 세계 안에서 생겨날 것이라고 상상했다. 신은 영원한 실재라기보다는 진화의 종착자로 여겨졌다. 이러한 신학에서 보면, 신이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신이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신이다. (251쪽)
인간은 다른 종과 달라 영혼이 있어 불멸할 것이라는 생각과, 인간의 과학적 지식과 기술은 필멸하는 인간을 불멸하는 인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고대로부터 AI가 발명된 현재까지 계속되는 인류의 판타지다. 문제는 그것이 신화의 형태이든, 종교의 형태이든, 주술의 형태이든, 과학의 형태이든 보편과 객관과 법칙의 이름으로 추구될 때마다 엄청난 학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인류는 수많은 동물들을 멸종시켰고, 문명이란 이름으로 야만인(?)들을 학살했다. 심지어는 우월한 인종이라는 명분 아래 열등한 인종이나 민족을 학살하는데 조금 더 주저함이 없었다.
존 그레이의 역작 《불멸화위원회》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영국의 상류층 사람들이 죽은 자들의 소리를 듣는 영매를 이용하여 인간이 불멸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던 '교차통신'의 사례와 러시아가 공산화된 후 과학기술을 통해 죽은 자를 불멸의 존재로 바꿀 수 있다는 '불멸화위원회'의 활동 사례를 통해 죽음을 극복하려는 이상한 시도를 자세히 탐색하여 기술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가 우월한 종족을 제외한 인간을 얼마나 많이 살해할 수 있는지 자세히 고발한다. 인종학살과 민족학살은 나치에게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볼셰비키가 점령한 러시아에서도 끔찍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존 그레이는 이 불멸화 프로젝트가 얼마나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했는지, 그리고 과학이란 이름으로 그것이 어떻게 실행되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필멸의 존재가 불멸을 추구할 때 세상은 엄청난 재난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해 보였다. 다윈주의에 따르면 모든 종은 반드시 필멸한다. 세상의 법칙을 발견할 만한 객관적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조차도 한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인간이 고안해 낸 주관적 구성물일 수도 있다.
지금도 영구보관되어 있는 레닌의 시신
이 책은 수 없이 많은 곳에 밑줄을 긋고 싶을 정도로 충격적인 사실과 견해를 밝히고 있다. 제목으로 뽑은 '불멸화위원회'는 레닌 사후 레닌의 시신을 영구보존하여, 언젠가 부활시키겠다는 과학적(?) 계획을 세우고 집행하는 곳이었다. 신종 메시아의 부활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러한 시도는 고대를 거쳐, 중세를 지나,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과학과 주술의 거리가 얼마 멀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시도 자체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이 책은 증명한다. 아래는 내가 밑줄 친 몇 구절을 옮긴 것이다. 길지만 음미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천천히 읽어보시길.
세계에서 지능이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의식적이지 않은 채로도 물질은 지능적일 수 있다. (새 떼나 개미 집단을 생각해 보라.) 또, 의식적인 존재가 자기 스스로를 파괴할 정도로 아주 비지성적일 수도 있다. 가이아 개념은 지구에 지적인 목적을 부여했다고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사실 가이아 이론은 목적이라는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엄격하게 다윈주의적인 용어로 구성될 수 있다. 지구는 의식성이 없더라도 인간보다 훨씬 더 큰 지적 역량을 갖추고 있다. 지구는 기능하고 있는 시스템인 반면 '인류'는 유령이다. 지능이라는 개념은 무분별한 인류에게 부여하기보다는 의식성이 없는 지구에 부여하는 편이 더 합리적이다. (253쪽)
진화의 과정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지능을 획득해 나가는 데는 의식성이 필요치 않다. 인간이 우주적 의식을 통합함으로써 불멸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보는 개념은 어느 것이든 설명이 깔끔하지가 않다. 마이어스와 루나차르스키의 이론에서는 인간 정신이 세계 영혼에 흡수되었다. 커즈와일에서는 인간 정신이 가상 우주에 업로드되었다. 두 견해 모두에게 인류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며 우주의 의식이나 정보에 녹아들어 간다. 무엇이 살아남든 개인은 소멸된다. 죽음은 정복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승리한다.
불멸주의는 인간 소멸 프로그램이다. 자연스러운 소멸 과정보다 더 완전하게 인간을 사라지게 하는 기획이다. 인간들은 분명히 사라지겠지만 소멸은 그들이 떠나온 불멸의 혼돈으로 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불멸주의자들의 시나리오에서 인간은 자신의 소멸을 기획한다. 영원히 살고자 한 동물은 새로운 종을 창조하기 위해 진화 과정에 개입하다가 그 자신의 존재를 끝장내고 만다. (254쪽)
그리고 존 그레이는 책의 말미를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마무리 짓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멸의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지만, 자기 삶의 꿈을 느슨하게 하는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 것은 곧 자신의 생기 없는 이미지만을 보존하려는 것이다. 이를 알게 된다면, 부활하고 싶거나 사후의 낙원에서 계속 살고 싶은 마음도 사라질 것이다. 죽을 수 없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유토피아처럼 내세는 아무도 살고 싶어 하지 않는 곳이다. 계절이 없으면 그 무엇도 익어서 땅에 떨어지지 않고 나뭇잎은 색이 변하지 않고 하늘도 공허한 파란색에서 다른 색으로 변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죽지 않으면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는다. 영원한 존재는 영원한 고요함이다. 무덤 속의 영원한 평화다. 불멸을 추구하는 자들은 혼돈에서 탈출할 길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그들 자체가 혼돈의 일부다. 자연적인 혼돈이든 신성한 혼돈이든 말이다. 불멸은 빈 스크린에 흐릿한 영혼이 투사된 것일 뿐이다. 그것보다는 낙엽이 떨어지는 쪽에 더 많은 행복이 있다.(273~2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