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에드워드 호퍼의 시선》을 읽으며 호퍼에 끌린 눈길은 자연스럽게 다음 책을 찾게 되었고, 이번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얼프 퀴스터가 지은 《호퍼(HOPPER A-Z)》이다. 호퍼의 작품 세계를 알파벳 A부터 Z로 시작되는 중심단어들로 정리한 이 책은 나름의 매력이 있다. 중심 단어는 다음과 같다. (책의 목차이기도 하다.)
A → American Landscape 미국 풍경
B → Buick 뷰익
C → Cape Cod 케이프 코드 Caricature 캐리커처
D → Dos Passos 더스 패서스
E → El Train 엘 트레인
F → Frost 프로스트
G → Gas Station 주유소 Goethe 괴테 Grass 잔디
H → House 집
I → Illustrations 일러스트
J → Jo 조
K → Kennedy 케네디
L → Literature 문학
M → Movies 영화
N → Nyack 나이액
O → Ogunquit 오건킷
P → Paris 파리
Q → Quebec 퀘벡
R → Realism 사실주의
S → Shadow 그림자
T → Time 시간
U → Unconscious 무의식
V → Verlaine 베를렌
W → Woods 숲
X → Xanthippe 크산티페
Y → Yonkers 용커스
Z → Zero 제로
위에 인용한 괴테의 시는 G항목에 나오는 호퍼의 <주유소(Gas)>라는 작품을 괴테(Goethe)의 시와 연관 지어 설명한 대목인데, 매우 설득력이 있다. 호퍼가 좋아했던 작가 중 프로스트와 괴테가 손꼽히는데, 괴테의 어떤 글은 평소에 적어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우울감은 호퍼의 기본적인 정서이고, 자연을 배경으로 한 인간문명의 초라함도 호퍼가 즐겨 그렸던 소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유소>는 호퍼의 대표작이자 호퍼에게 유명세를 안겨주었던 작품이며, 호퍼의 작품세계를 정확히 포착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책은 2023년 한국 최초로 호퍼 회고전이 개최된 것에 맞추어 한길사에서 출간하였다. 호퍼의 작품세계를 방점 찍듯이 감상할 수 있는 책이고, 이전의 읽었던 책과는 또 다른 맛을 주는 책이라 선택했다. 읽으며 내가 가장 고개를 끄덕인 항목은 'Time시간'이었다. 작가는 말한다. "시간은 호퍼의 예술, 그리고 그의 삶에 있어서도 일관된 주제다. 그의 시간은 기다림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아이디어를 기다리고, 모티프를 기다리고, 이 모티프가 내면의 이미지로 진화하기를 기다리고, 드디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리고, 그림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시간이다."(112쪽) 호퍼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 작품은 모두 시간의 흐름 속 포착된, 극도의 강렬함으로 재현된 하나의 순간이다."
시간(대)을 제목으로 한 그의 작품 몇 점을 감상하자.
호퍼, <이른 일요일 아침> (1930)
<오전 7시> (1948)
<오전 11시> (1926)
호퍼, <나이트호크> (1942)
작가는 순간(시간)을 포착하여, 그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간에 민감해야 한다. 호퍼는 그 시간을 멋지게 포착한 리얼리스트였다. 호퍼만 그렇겠는가. 모든 작가들은 기다림의 존재이다. 자신에게 펼쳐진 경험들을 내면에 차곡차곡 접어두었다가, 그 접힌 무늬가 일정한 영감을 불러일으키면, 그것이 발화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것이 영상이든, 소리이든, 글자이든 모든 작가는 기다림이라는 창작의 과정을 기꺼이 감내하는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