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호퍼의 시선

2024. 2. 4.

by 김경윤
책 표지는 호퍼의 <여름날>(1943년)의 일부이다.

호퍼는 주로 도시와 고독, 빛과 그림자, 미국의 리얼리즘 등의 표현으로 수식되지만, 만약 호퍼의 그림을 설명하기 위한 어휘를 하나만 남겨야 한다면 그 말들은 쓸려나가고 '에로티즘'만이 굳건히 남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도박판에서 카드를 쥔 도박사들처럼, 저마다 중요한 카드를 들고 있다. 어떤 예술가들은 그 카드가 한 장뿐이고, 어떤 예술가는 여러 장이다. 호퍼는 대충 두 장쯤인 것 같다. 에로티즘이라는 카드 한 장, 그리고 에로티즘을 뺀 나머지 모두를 합친 한 장.

하지만 호퍼의 에로티즘은 당혹스러울 만큼 노골적이고 유치하다. 어찌 보면 백일몽에 가깝다. 스스로 잘 알면서도 그걸 카드로 삼았으니 실로 담대한 예술가다. 아니면 초탈한 예술가이거나.(135쪽)



일요일. 오늘 같이 관광객이 별로 없고, 날씨가 흐린 날은 기분도 가라앉게 된다. 이럴 때는 가볍게 그림이 잔뜩 들어간 책을 읽는 것이 좋다. 그래서 선택한 책이 이연식이 쓴《에드워드 호퍼의 시선》(은행나무)이다. 알라딘의 책 소개에 따르면 "미술사가 이연식이 국내 작가로서는 최초로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세계를 조명하고 분석하였다. 서양화를 전공한 후 미술이론을 연구한 이력을 바탕으로 캔버스의 안과 밖을 관통하는 날카로운 분석, 미술사를 다각도로 살펴보며 예술의 정형성과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다양한 저술·번역·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저자는 이 책에서 호퍼의 작품을 15가지 주제로 나누어 바라보고, 그의 작품 세계에 숨은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 책은 호퍼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정립해 나가던 시기의 그림들부터 〈도시의 아침〉, 〈주유소〉, 〈바다 옆의 방〉, 〈일광욕하는 사람들〉, 〈일요일 이른 아침〉 등 호퍼의 대표작들을 포함해 호퍼의 그림 55점을 수록, 분석한다."


호퍼의 그림을 한꺼번에 모아서 감상하는 재미도 있지만, 그 그림을 설명하는 저자 이연식의 문체가 참으로 흥미롭다. 짧게 치고 빠지는 문장에서는 자신의 감상을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자신감이 엿보인다. 그림의 정황을 표현하는 대목은 마치 호퍼랑 같이 그림을 그리는 듯 간단하고 명료하다. 단도직입! 짧은 문장을 선호하는 작가는 사고의 흐름이 명료하고, 상황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 이런 문체를 본 적이 참으로 오랜만이다.


호퍼의 그림을 보면서, 내가 감정이입했던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 몇 개를 소개한다.

호퍼의 <푸른 저녁(Soir Bleu)> (1910년)

나는 저 담배를 물고 있는 광대의 모습이 마치 나처럼 느껴졌다. 광대 맞은 편의 사람은 오히려 광대에게 관심이 없는 듯하지만, 오른쪽의 두 남녀는 광대를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바라본다. 이 모든 광경을 중앙의 여인이 관찰하는 듯하다. 왜 광대는 분장도 지우지 않은 채로 앉아 있는 것일까? 일을 하다가 잠시 쉬는 것일까? 아니면 분장을 지우지도 못할 정도의 심정으로 앉아있는 것일까? 혹시 이 광대분장은 작가의 숙명이 아닐까?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이 드러나는 것이 작가니까.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1910년에 뉴욕으로 돌아온 호퍼는 파리에서 보낸 시절을 떠올리며 이 그림을 그렸다. 광대를 비롯한 이들은 함께 앉아 있지만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고 저마다 생각에 잠겨 있다. 교감이라고는 없다. 함께 있기에 더욱 고독할 뿐이다. 담배를 피워 물며 테이블을 내려다보는 광대는 낙담하고 우울한 모습인데, 이 그림을 그릴 무렵 호퍼 자신이 예술가로서의 미래에 대해 품었던 불안을 투사한 것이다.

그림 속 공간은 누가 봐도 파리의 카페이고, 제목도 짐짓 프랑스어로 달았다. 호퍼가 파리에 있을 때 프랑스 미술계에서는 야수주의와 입체주의가 한창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호퍼는 그쪽으로는 눈을 돌리지 않고 19세기에 활약했던 예술가들을 스승으로 삼았다. 이 작품은 호퍼가 프랑스 미술에서 받은 감회를 나름대로 집대성한 것이다. (...) 미국 미술계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이 작품을 호퍼는 창고에 처박아 버렸다."(116~7쪽)

호퍼, <철학으로의 도피>(1959년)

그림에는 반나의 여인이 엉덩이를 드러낸 채 모로 누워있고, 남자는 옷을 입은 채 침대에 앉아 있다. 그 옆에 책 한 권이 펼쳐져 있다. 제목이 <철학으로의 도피>이니, 철학책인가? 알 수 없다. 하지만 남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저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철학으로의 도피>에 등장하는 남성은 제목 그대로 현실 바깥으로 여행을 떠났다. 아니, 여행을 떠나려 한다. 남성의 뒤로는 그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여성이 돌아누워 있다. 여성의 엉덩이가 훤히 보인다. 엉덩이는 그저 드러나 있는 게 아니라 말을 걸고 있다.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나이 든 남성은 여성의 요구에 응할 수 없다. 제목은 '철학으로의 도피'지만, '철학'을 예술이나 문학, 지적이고 감성적인 어떤 활동으로 바꾸든 상관없을 것이다.

남성의 모습을 찬찬히 보면 그저 회피하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남성은 결연하다. 여기만 아니라면 어디든 상관없다는 듯이."(48쪽)

호퍼, <일광욕하는 사람들> (1960년)

호퍼의 작품에는 책들이 자주 등장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책의 의미는 다양한다. 현실도피일 수도 있고, 고통스러운 현실일 수도 있으면, 무료함이나 걱정을 뜻하기도 한다. 나는 책 읽는 사람이라 그런지 호퍼의 작품에 나오는 책에 자꾸 눈길이 간다. 저자는 이 책 읽는 사람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림 속에서 뒷줄에 앉은 한 사람이 눈이 띤다. 책을 읽으며 자신의 세계에 들어앉으려 한다. 집중하기 위해 짐짓 애를 써야 한다.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며 반란을 꾀한다. 하지만 그늘에 숨지 않은 이상 햇볕은 공평하다. 으슬으슬한 공기도 공평할 것이다."(85쪽)


저자는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의 주제를 '에로티즘'이라 표현했지만, 나는 자꾸 에로티즘보다 책 쪽으로 눈길이 간다. 어쩔 수 없다. 책이 등장한 몇 개의 작품을 더 소개하고 끝내자.


<추신>

작품들을 올려놓고 보니 독서의 주인공이 모두 여자들이다. 묘한 공통점이다. 여인들은 책을 읽는 것 말고도 다른 용도로 쓰나?


<추신2>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13점을 모티브로 해서 구스타드 도이치가 만든 <셜리에 관한 모든 것>(2013년)이라는 영화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유튜브에 있는 동영상을 함께 올린다.


https://youtu.be/s7-Ngwv4Ha8?si=v692FQcNtJOSujUs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무위인-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