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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May 19. 2024

책 : 이처럼 사소한 것들

2024. 5. 19.

10월의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Barrow 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사람들은 침울했지만 그럭저럭 날씨를 견뎠다. 상점 주인, 기술자, 우편 업무를 보거나 실업 급여를 타려고 줄을 선 사람들, 우시장, 커피숍, 슈퍼마켓, 빙고 홀, 술집, 튀김 가게에 있는 사람들 모두 저마다 추위에 대해 또 비에 대해 한마디씩 하며 서로 이게 무슨 의미냐고 -- 이 날씨가 어떤 조짐은 아니냐고 -- 아니 또 이렇게 매운 날이 닥칠 줄 누가 알았겠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학교로 갔고 엄마들은 고개를 숙이고 빨랫줄로 달려가는 데 이제 익숙해졌거나 아니면 아예 빨래를 내다 걸 생각조차 안 했고 해 지기 전에 셔츠 한 장이라도 말릴 수  있으란 기대도 안 했다. 그러다가 밤이 왔고 다시 서리가 내렸고 한기가 칼날처럼 문 아래 틈으로 스며들어, 그럼에도 묵주 기도를 올리려고 무릎 끓은 이들의 무릎을 할퀴었다. (11~12쪽)




1.

주말이 되면 독서에도 휴식을 주기 위해 소설을 읽기로 했다. 긴소설은 근무조건상 부담스러워 얇은(?) 소설을 읽기로 한다. 단편이나 중단편 소설이 적합하다. 보르헤스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이 가진 위용을 이미 경험했기에 단편이나 중단편이 주는 독서의 기쁨을 알고 있다. 최근 들어 클레어 키건의 소설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휴일날 동네서점에서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구입하여 주말에 읽었다. 다 읽고 나서 처음 드는 생각은 원서를 구입해서 읽어봐야겠다는 것. (번역도 훌륭하지만 원어가 주는 맛을 느끼고 싶을 정도로 문장이 좋다.) 위의 인용구는 소설의 도입부이다. 동네의 풍경을 묘사하는 장면인데, 풍경을 통해 환기되는 정서가 절묘하다. 마치 소설 전체의 운명을 결정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오랜만에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읽은 소설이다. 여성 소설가의 섬세한 묘사와 정서 표현을 맛보면서 참으로 부러웠다. 이런 표현력은 상상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어린 시절의 체험이 바탕이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2. 

소설의 첫 페이지에는 "아일랜드의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바칩니다."라고 쓰여 있고, 뒷장을 넘기면 <아일랜드 공화국 선언문>의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아일랜드 공화국은 모든 아일랜드 남성과 여성으로부터 충성을 받을 권리가 있고  이에 이를 요구한다. 공화국은 모든 국민에게 종교적 시민적 자유,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기회를 보장하며, 국가 전체와 모든 부분의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고 모든 아동을 똑같이 소중히 여기겠다는 결의를 천명한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정치적, 사회적 소설이겠구나 상상하지만 그 기대와는 달리 소설은 진행된다.

소설의 배경은 아일랜드, 주인공은 목재와 석탄을 판매하는 펄롱. 그저 가난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가족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성실하게 살아가는 노동자다. 그가 우연히 " 자신이 속한 사회 공동체의 은밀한 공모를 발견하고 자칫 모든 걸 잃을 수 있는 선택 앞에서 고뇌하고 결단하는" 모습을 소설은 잔잔히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그 잔잔함이 주는 뭉클함이 있다. 


2.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 소개에 따르면 ; “십여 년 만에 마침내 나온 클레어 키건의 신작이 고작 100여 쪽에 불과한 데 실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길. 키건은 단어 하나 낭비하지 않는 작가니까.” 『맡겨진 소녀』(104쪽)에 이어 11년 뒤 출간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소개하며 영국의 문화평론가 베리 피어스가 남긴 말이다.
키건은 자국 아일랜드를 비롯한 유럽에서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작가였으나, 다른 대륙으로까지는 그 명성이 채 전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2021년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출간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독자들에게, 마치 지나간 시간들을 벌충하려는 듯한 광적인 흥분을 일으켰다. 그러한 현상을 더욱 부추긴 사건은 이 책이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등극한 것이다. 원서 기준으로 116쪽에 불과한 이 책은 ‘역대 부커상 후보에 오른 가장 짧은 작품’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키건의 소설에 지배적인 사조가 있다면 그것은, 기꺼이 드러내지 않음과 효율에 대한 집착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덜어내는 작업’이라고 일컬으며 무엇보다 간결함으로부터 기쁨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초기작부터 이어져온 이러한 성격은 주인공 빌 펄롱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도 드러나는데, 이토록 긴 대화나 너절한 설명을 피하는 것은 동시에 소설 속 인물을 위한 작가의 배려이기도 하다. 키건은 등장인물이 인정하길 꺼리는 감정들을 작가가 노출하는 것이 부적절하게 느껴진다며 이렇게 덧붙인다. “훌륭한 글쓰기란 훌륭한 예의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3.

출판사에 책 소개에 에누리 없이 동의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다 읽고 나서 문뜩 알아차린 것. 예전에 일산에 살고 있는 후배 경호에게 이반 일리치의 책들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엉뚱하게 다른 책 한 권을 끼워 보낸 적이 있었다. <맡겨진 소녀>라는 제목을 가진 소설책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키건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어서 경호가 왜 이 책을 보냈지 궁금한 채로 책꽂이에 눕혀 놓았었다. 그 책을 이제 반가운 마음으로 손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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