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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May 30. 2024

책 : 쾌락

2024. 5. 30.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믿음에 익숙해져라. 왜냐하면 모든 좋고 나쁨은 감각에 있는데, 죽으면 감각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임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되면, 가사성도 즐겁게 보게 된다. 이것은 그러한 앎이 우리에게 무한한 시간을 삶을 보태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불멸에 대한 갈망을 제거시켜주기 때문이다. "죽음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라는 사싫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살아가면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을 때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죽게 된다는 예상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헛소리를 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죽음이 닥쳐왔을 때 고통스럽지 않은데도 죽을 것을 예상해서 미리 고통스러워하는 일은 헛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는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때로는 죽음을 가장 큰 악이라고 생각해서 두려워하고, 다른 때에는 죽음이 인생의 악들을 중지시켜준다고 생각해서 죽음을 열망한다. 반면 현자는 삶을 도피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삶의 중단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삶이 그에게 해를 주는 것도 아니며, 삶의 부재가 어떤 악을 생각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음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자는 단순히 긴 삶이 아니라, 가장 즐거운 삶을 원한다. 그래서 그는 가장 긴 시간이 아니라 가장 즐거운 시간을 향유하려고 노력한다." (43~44쪽)



1.

소크라테스는 글을 한 편도 쓰지 않았으나, 그의 제자 플라톤 때문에 엄청난 기록물이 남아있다. 소크라테스가 화자로 등장하는 대화편은 모두 플라톤이 쓴 것이다. 그에 반해 에피쿠로스는 엄청난 양의 저작물을 남겼으나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파편적인 것 뿐이다. (이래서 제자를 잘 만나야 한다.) 그나마 긴글은 편지여서 그의 논리를 부족하나마 유추할 수 있다. 그렇게 남아 있는 글에서 대부분을 번역하여 소책자로 엮은 것이 <쾌락>이다.

에피쿠로스는 헬레니즘 시대(아테네의 몰락, 마케도니아의 흥망성쇄, 로마의 흥성)에 쾌락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타락하고 성을 탐닉하는 자로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오해 중 오해다. 에피쿠로스가 이야기하는 쾌락은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 동적인 것보다는 정적인 것, 순간적인 것보다는 지속적인 것, 그리하여 가장 고귀한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쾌락 속에는 쓸데 없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금욕이, 더욱 큰 쾌감을 위해 감내하는 고통이 포함되어 있다.  

에피쿠로스는 감각을 믿었고, 우주는 원자와 허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신이 있다면 스스로 자족하고 행복한 자이기에 남의 행, 불행 따위에 개입하지 않는 존재라 생각했다. 그는 사려깊은 태도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계산해보라고 제안한다. 그리하여 유쾌한 삶을 사는데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해보라는 것이다.


2.

<중년의 철학> 강의를 준비하면서 이번에 다시 <쾌락>을 읽는다. 도시에서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잘 이해되는 것은, 에피쿠로스가 살면서 처한 상황과 내가 이 나이가 되어 처한 상황의 싱크로율이 높기 때문이다. 공동체 아테네는 제국주의로 인해 파괴되고, 시민들은 개인으로 파편화되면서 길을 잃었을 때, '철학자의 정원'이라는 지혜와 우정의 작은 공동체를 꾸려 아테네 시민들에게 위로를 주었던 에피쿠로스의 삶이 크게 다가온다. 게다가 노예든 창녀든 같이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환영했던 환대의 공동체 역시 내가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가파도에서도 그런 공동체가 가능할까? 천천히 모색해 봐야겠다.


3.

<쾌락>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대목을 인용해둔다. 에피쿠로스의 생각에 빠져보시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분해된 것은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감각이 없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13)


사려 깊고phronimos 아름답고kalos 정직하게dikaios 살지 않고서 즐겁게 살 수는 없다. 반대로 즐겁게 살지 않으면서 사려 깊고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 수는 없다. 사려 깊고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기 위한 척도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즐겁게 살 수 없다.(14)


다른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이 안전이, 고통을 제거하는 어떤 힘 또는 부에 의해서, 어느 정도까지 달성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가장 순수한 안전은 대중으로부터의 고요와 은거로부터 생겨난다. (16)


정직한 자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만, 부정의한 자는 고통으로 가득하다. (17)


인생의 한계를 배운 사람은 결핍으로 인한 고통을 제거하고, 삶 전체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쉬운 일임을 안다. 그래서 경쟁을 포함하는 행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18)


일생 동안의 축복을 만들기 위해서 지혜sophia가 필요로 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우정의 소유이다.(20)


자연의 정의는,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해침을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려는, 상호 이득의 협정이다.(21)


정의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어디서든 사람들의 상호 관계에 있어서 서로 해치지 않고 해침읋 당하지 않으려는 계약이다. (21)


자신의 이웃들로부터 안전을 가장 잘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가장 확실한 안전의 보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웃들과 아주 즐겁게 산다. 그리고 가장 완전한 친밀감을 누린 후에 친구가 먼저 세상을 떠나더라도, 그 친구가 동정의 대상인 양 슬퍼하지 않는다. (23)


우리는 젊은 사람을 행복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산 노인을 행복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젊은이는 혈기왕성해서, 운에 의해서 흐르는 물처럼 이리저리로 이끌려다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인은 마치 항구에 닻을 내리듯, 자신의 노령에 닻을 내린다. 그래서 과거에는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좋은 일들을 감사히 안전한 곳으로 가져온다. (26)


자신에게 일어났던 좋은 일들을 잊고서, 그는 오늘 이미 노인이 되었다.(26)


자연의 목적에 따라 평가한다면, 가난은 큰 부이다. 반면 무제한적인 부는 큰 가난이다. (27)


다른 일의 경우에는, 그 일이 다 끝났을 때 비로소 힘겹게 열매를 얻어지지만, 철학의 경우에는, 기쁨이 앎gnosis과 동반한다. 왜냐하면, 모두 배우고 나서야 즐거움이 오는 것이 아니라, 배움mathesis과 즐거움이 동시에 생기기 때문이다. (27)


우정에 너무 적극적인 사람과 너무 머뭇거리는 사람은 모두 옳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우정을 위해서 모험을 해야 한다. (28)


어떤 사람들은 일생 동안 생계 수단을 모은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 모두가 태어날 때 죽음의 약을 마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8)


친구들의 도움이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도와줄 것이다'는 믿음이 우리를 돕는다. (29)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바라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마저 망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도 행운의 선물이었다는 점을 기억하라. (29)


삶을 포기할 많은 구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주 별볼일 없는 자이다. (29)


우리는 웃으면서 철학을 해야 한다. 그리고 집안일을 해야 하고, 우리의 다른 능력들을 사용해야 하며, 올바른 철학의 소리를 중단 없이 알려야 한다. (30)


우리는 철학을 하는 체하면 안 되며, 실제로 철학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필요한 것은 건강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건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32)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신들에게 요구하는 일은 무익하다. (34)


충분한 것을 적다고 느끼는 자에게는 어떤 것도 충분치 않다. (34)


고결한 사람gennaios은 무엇보다도 현명함과 우정에 신경을 쓴다. 이들 중 전자는 사멸하는 선agathon이고 후자는 불멸하는 선이다. (35)


아름다움과 탁월함arete 등은 우리에게 쾌락을 제공할 때 가치를 지닌다. 이들이 쾌락을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 (40)


우리는 자기 만족autarkeia을 큰 선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항상 적은 것을 향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비록 많은 것을 자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서 적은 것들에 만족하기 위해서이다 : "가장 적은 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사치에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 "모든 자연적인 것은 얻기 쉽다. 반면 공허한 것은 얻기 어렵다."(47)


내가 말하는 쾌락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왜냐하면 삶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계속 술을 마시고 흥청거리는 일도 아니고,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도 아니며, 물고기를 마음껏 먹거나 풍성한 식탁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모든 선택과 기피의 동기를 발견하고 공허한 추측들 -- 이것 때문에 마음의 가장 큰 고통이 생겨난다 --을 몰아내면서, 멀쩡한 정신으로 계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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