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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Jun 16. 2024

책 :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2014. 6. 16.

시간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없다. 생물이 노화하듯 무생물도 풍화하고 침식되며 소멸로 나아간다. 자신이 태어난 장소로 돌아가서 흙으로 동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시간이 주는 놀라운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이끼 낀 담장, 세월이 묻은 벽돌, 오랜 손길로 윤이 나는 마루, 그리고 폐허의 아름다움. 자연의 감가상각이 건축물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경우다.

사람도 그렇다. 노년에 이르러 영혼이 아름다운 인간을 만나면 나는 감탄한다. 세상이 준 수많은 상처를, 인간을 이해하는 단초로 쓰는 이를 보면 콧등이 시큰해진다. 환경과 경험이 존재를 규정함에도 상황을 초월하는 인간은 경이의 대상이다. 쇠락이 완성의 과정이 되는 존재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329쪽)



김미옥이란 이름은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시인과 논쟁을 벌였다. 나는 서평가의 글에 시인이 그렇게 발끈할 필요가 있나 의아했다.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나는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그 논쟁에서 벗어나 관전조차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릴 해프닝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그런데 이번에는 서평가 김미옥이 쓴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와 그의 자서전격인 <미오기傳>이 갑자기 지인들의 페이스북에 계속 소개되고 있었다. 반격인가? 나는 서평가는 아니지만 꽤나 많은 독후감을 남긴 사람으로, 서평을 정성 들여 쓰는 김미옥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부제에서 밝히고 있듯이 '활자중독자'라고, '활자 곰국을 끓이는 여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그 솔직함과 자신감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괜찮은 서평집을 자주 사는 편이다. 내가 쓰는 서평(?)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다. 좋은 책을 소개받는다면 금상첨화이고. 내가 알고 있는 괜찮은 서평가로는 이권우가 있다. 이권우의 책을 읽으면 책을 사게 된다. 그 말인 즉, 그가 그만큼 책을 잘 소개하기 때문이다. (좋은 서평은 구매를 부른다.)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는 아주 천천히 시간이 날 때마다 야금야금 읽었다. 2주가 걸린 것 같다. 아, 꽤 좋은 서평집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그녀의 기억력에 감탄했다. 문장을 곰국 끓이듯 쓴다는 것은, 그만큼 시간의 깊이를 견뎌낸다는 것이다. 지금 읽을 것뿐 아니라, 과거에 읽었던 것을 소환하여 비교하는 능력은 참으로 부러웠다. (나는 나의 저질 기억력을 한탄했다.) 게다가 김미옥의 문체는 너무도 자연스러워 마치 문장 속에서 내가 들어가서 산책하는 기분이었다. 참으로 편안한(?) 책 여행이었다. 특히 감탄스러운 부분은 글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들이다. 글을 얼마나 공들여 쓰는지 글 써본 사람들은 안다. 마지막 문장은 화룡점정과 마찬가지라. 그 문장만으로 글 전체에 값하는 문장이 있다. 첫 문장뿐 아니라 마지막 문장도 그러하다.


"위태로운 청춘을 무사히 건너게 해준 것이 독서였다면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글쓰기였다."(책머리 첫 문장, 4쪽)


"내 어린 시절 나를 일으켜 세워준 건 작가들인데, 왜 그리 혹독하게 굴었던 걸까? 나는 독자도 진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6쪽, 마지막 문장)


"내가 소장하던 책도 그리고 나의 책도 먼 훗날 헌책방을 떠돌게 될 것이다."(24. 마지막 문장)


"내게 오는 데 백 년이 걸린 책에게 말을 건넨다. 이제 서있지 않아도 된다."(27쪽, 마지막 문장)


"모차르트와 라벤더와 안톤 체호프가 있는 밤이다."(33쪽, 마지막 문장)


"나는 다시 창밖을 본다. 혹독한 겨울이 오고 있다."(45쪽, 마지막 문장)

-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한참을 멈췄다. 고양이에 대한 글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가 살던 시대의 불혹은 지금의 노년이었을 것이다."(49쪽, 마지막 문장)


(......)


그만 옮기자. 글 처음에 인용한 구절은 책의 막바지에 읽은 <풍화에 대하여>라는 책을 소개하며 시작한 글이다. 늙어가는 요즘, 나도 풍화를 떠올린다. 잘 늙고 잘 낡아가길 기대한다. 그래서 그의 글이 오래도록 남았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서평집을 읽으며, 그녀 덕분에 많은 책을 주문했다. 안에 그녀의 에세이 <미오기傳>을 포함시켰다. 소개가 아닌 서평가 자신을 소개하는 글이라니 더욱 읽고 싶어 진다. 나도 언젠가는 나의 독서 편력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겹쳐졌다. 자, <미오기傳>을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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