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윤 Jul 01. 2024

오늘 : 안개

2024. 7. 1.

1.

어제는 풍랑주의보로 하루 종일 잠을 잤다. 덕분에 새벽녘에는 잠이 오지 않아 컴퓨터를 켜고 이것저것 조몰락거리다가 일찍 터미널로 출근했다. 주의보는 해제되었지만 해무(海霧)가 짙게 깔려 있다.  배가 뜨려나? 출항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별다른 통보가 없어 발권을 시작했다. 20여 명이 첫배를 타고 나간다. 그런데 갑자기 안개로 운항이 정지되었다는 통보가 왔다. 발권한 사람들에게 환불하느라 잠시 소동이 있었다. 9시 배에 이어 10시 배도 운항이 정지되었다. 11시 배는 미확정이란다. 안개로 배가 뜨지 않은 것은 매표원을 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육안으로 1킬로미터가 안 보이면 운항을 못한다더니 정말 안개로 배가 안 떴다.

2.

김승옥의 <무진기행>이란 소설을 보면 안개가 주는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잘 나타난다. 안개는 존재를 비존재로 만드는 묘한 능력이 있다.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니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안개는 그러한 존재/비존재의 경계를 지우고 몽환적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지우고,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되게 만들기도 하고, 가능한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안개는 이분법적 사유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자유의 지점을 창조한다. 안갯속에서 우리는 우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수도 있고, 몰래 일탈을 꿈꿀 수도 있다. 심지어 공포를 만들어내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3.

삶도 그런 것 아닐까. 오리무중(五里霧中), 살면서 점점 경계가 흐려지고, 시야가 뿌였게 되기도 한다. 긍정과 부정을 판단할 수 없고, 선과 악의 경계도 불투명해진다. 나이가 먹는다는 것은 햇빛 쨍쨍한 대낮도 아니고, 깜깜한 밤중도 아닌 어둠도 밝음도 아닌 상태에서 한 발 한 발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살아온 길도 지워지고 살아갈 날도 안 보이지만 바로 앞은 희미하게 보여서 조심조심 살아갈 수밖에 없다.


4.

11시쯤 되자 안개가 서서히 개더니 송악산과 산방산이 안갯속에서 언뜻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온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야가 넓어지니 마음이 놓인다. 비가 내려 안개가 걷히든, 바람이 불어 안개가 날아가든 앞을 조금 더 볼 수 있다면 조금은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된다. 11시 배가 뜬다는 소식이 알려지고, 9시 배를 타기 위해 왔던 주민들이 다시 매표소로 찾아온다. 시간은 좀 늦었지만 나갈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 : 가파리 청년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