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소설가는 동굴 속에 있던 이야기꾼의 후손입니다. 길고 깊은 어둠, 작은 모닥불, 하나의 마음이 되는 여러 사람, 짧은 시간이지만 두려움과 굶주림을 잊을 수 있는, 기본적으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고대와 비교하면 지금 세상은 훨씬 더 밝은 곳이 되었습니다. 빛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도시의 밤은 빛으로 인해 밝아질 수 있지만, '어둠'은 항상 깊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영혼의 진짜 어둠은 새벽 3시에 온다.'라고 에세이에 썼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어둠입니다. 고대와 오늘날에는 이런 어둠을 밝힐 수 있는 작은 모닥불이 항상 필요합니다. 그거 아마도 소설만이 제공할 수 있는 빛일 것입니다. 그 모닥불을 염두에 두고 40년 동안 중단 없이 계속해서 글을 썼습니다. 제 이야기가 전 세계의 많은 곳에서, 많은 동굴 속의 어두운 구석을 밝히는 것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또 앞으로도 계속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기쁜 일이 없을 것입니다." (57~58쪽)
- 이탈리아 라트 그린잔 문학상 수상연설(2019)
1.
간밤에 대한민국의 멍청한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고, 그로부터 2시간 반 후에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계엄령 해제를 선언하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역사적 사건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나는 그 시간에 깨어 밤을 지새우다 오늘 급기야 직장에 지각하는 사태까지 맞이했으니, 참으로 엉망진창인 하룻밤이었다. 아침에 멀리 보이는 눈 덮인 한라산이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심호흡을 한다. 하룻 아침에 내란은 종식되었고, 너무도 멀쩡한 하루가 새로 시작되었다.
2.
나는 접어두었던 책갈피를 펴고 다시 읽는다. 신성현이 쓴 <하루키를 만나다>(알비, 2024)이다. 부제는 "15년의 아카이빙, 하루키를 이해하는 40가지 키워드"다.
대한민국에 넘쳐나는 하루키스트 중에 신성현은 독보적이다. 그의 소개를 보자. "2003년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하루키스트가 된 이후, 하루키의 모든 작품을 탐독하고 있다.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해 해결되지 않는 갈증을 해결하고자 15년 넘게 전 세계에서 진행된 230여 편이 넘는 하루키의 인터뷰와 30여 편의 논문을 찾아보았다. 2014년 그의 작품 속 여행지를 찾아 나선 여행 기록인 『하루키를 찾아가는 여행』을 펴냈으며, 이듬해 중국과 대만의 독자들에게도 소개되었다. 2019년에는 이전 여행에서 미처 닿지 못한 곳을 습득해 2차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매거진 B』 교토 편, 『W 코리아』 마니아 여행기 등 하루키에 대한 다양한 글을 썼다.
하루키스트 모임 ‘하루키 살롱’을 운영하며 독서 모임을 주최하고, 하루키스트들과의 이야기로 하루키와 그의 작품에 대해 소통하고 있다. 어느덧 하루키의 나이도 70대 중반이 된 지금, 여전히 하루키 소설의 첫 장을 넘기는 따뜻하고 가슴 뛰는 감정을 느끼고 싶은 소망으로 살고 있다." 이 정도면 책을 쓸만하다.
3.
누군가의 세계를 몇 개의 키워드로 정리하는 것은 간단하면서도 위험한 일이지만, 저 정도 경력의 연구자라면 그의 키워드에 끌려 하루키를 접해볼 만하다. 키워드 별로 짤막한 정리 해 놨는데, 크게 네 개의 서랍에 열 개의 키워드를 묶어놨다. 키워드만 옮기자면 : 첫 번째 서랍, 태도 - 달리기, 양사나이, 시나몬 잉크 자료실, 커미트먼트, 크림 드 크림 Creme de la Creme, 아쿠타가와상, 라디오, 여행, 비현실적인 몽상가, 드라이브 마이 카 // 두 번째 서랍, 영감 - 스파게티, 맥주, Pit Inn, 프란츠 카프카, 무라카미 라이브러리, 고양이, 제3의 신인, 도서관, 커피, 비틀스 The Beatles // 세 번째 서랍, 비밀 - 아버지, 선구, 죽음, 중국행 슬로보트, 도넛, 매직 리얼리즘, 그림자, 벽, 러브 스토리, 그리스 // 네 번째 서랍, 탐험 - 일인칭 소설, 서랍, 키노쿠니야, 영매, 스콧 피츠제럴드, 메타포, 교토, 가와카미 미에코, 더 뉴요커 The New Yorker, 우물
만약에 여러분이 저 키워드만 보고 하루키와의 연관성을 반 이상 말할 수 있다면, 여러분도 어느 정도는 하루키스트임이 분명하다. (나는 아니다.) 키워도로 보는 하루키는 나름 도움이 되었는데, 하루키와 좀 더 친해졌다고나 할까. '슬슬, 하루키 작품을 읽어봐야겠군' 이라든가, '내 세계를 키워드로 정리하면 몇 개쯤 될까?'라든가, '내 작품을 모두 읽은 사람들이 있을까?'라든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4.
저자의 하루키 소개도 간략하고 좋았지만, 더욱 좋았던 것은 하루키의 인터뷰글들이었다. 내가 밑줄 친 몇 구절만 기록 차원에서 옮겨 놓는다.
<1Q84>에 대하여 하루키는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마음의 상처가 있고 손상되고 방향을 잃은 그들도 사랑을 갈구하고, 그 대상을 계속 찾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아오마메는 늘 완벽한 사랑을 꿈꾸고 있습니다. 사랑은 2명의 주인공을 삶의 다른 레벨로 이끄는 것이죠. 나는 그 메커니즘,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사람들을 다른 장소로 데리고 갈 수 있는지, 그 문제에 관심이 있습니다." (172쪽)
- 스페인 라 반구아르디아 인터뷰(2011)
약간은 비현실적인 영매들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유를 묻자, 하루키가 대답한 것도 재밌다.
"때때로 전 선사시대의 이야기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사람들은 동굴 안에 갇혀 있고요. 동굴 밖에서는 비가 내립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는 몇 개의 이야기를 풀어내죠. 제 주위에는 어둠이 있고, 동시에 수많은 영매가 있어요. 전 그것들을 붙잡아 두어야 합니다. 그것들은 제 주위에 언제까지나 존재하고 있답니다.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해요. 전 전문적인 이야기꾼이지만, 그런 것을 떠나 가능한 좋은 이야기꾼이 되고 싶어요. 동굴 속 생활은 꽤 비참한 것이지만, 제 직업은 그 동굴 속의 사람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통해 비참한 삶을 잊게 하는 거예요. 이를 위해서 저는 이야기꾼으로서의 기술을 계속해서 발전시켜 왔어요. 비록 모든 독자에게 그 기술이 전달된 것은 아닐 테지만, 그 기술은 이야기를 거듭하며 좋은 이야기로 발전됩니다."(202~203쪽)
- 독일 더 차이트(2014)
마지막으로 하루키 소설의 자주 등장하는 장치인 '우물'에 대하여 저자가 마지막으로 인용해 놓은 구절이다.
"사람은 그 인생에서 한 번쯤은 황야로 들어가 건강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지루하기까지 한 고독과 절망을 경험해야 한다. 자신이 오직 자기의 육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뒤에 자신에게 숨겨져 있는 진실한 힘을 깨달아야 한다."(238쪽)
<사족>
12월 안에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내란사태로 인해 현 대통령이 금년 안에 탄핵된다는데 500원을 걸었다. 옆에 친구는 금년을 넘긴다는데 1000원을 건다. 내가 이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