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단순히 현세에서 인간의 평범한 행복을 키우고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불을 쬐며 한담을 나누는 부부, 선술집에서 다트 게임을 즐기는 친구들, 자기 방에서 책을 읽거나 정원에서 땅을 파는 남자 -- 바로 이를 위해 국가가 있다. 그런 순간들을 늘리고 지속시키고 지켜 주지 않는 한 모든 법률과 의회와 군대와 법정과 경찰과 경제 등은 시간낭비일 뿐이다. (145쪽)
- <순전한 기독교> 중에서
1.
87년 민주화운동 때 나는 명동성당의 차가운 계단에 앉아 있었다.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때에는 가족과 함께 광화문을 누볐다. 오늘 나는 가파도 매표소에 앉아 있다. 평소라면 분명히 여의도 부근에서 지인들과 깃발을 들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지인들은 오늘 분명히 광화문이나 용산이나 여의도 부근에서 약속을 잡고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모두 무사하라고. 모두 안녕하라고. 그리고 대한민국의 역사가 좀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나아가라고.
2.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루이스의 저작 중에서 독서와 관련된 항목만을 모아 엮는 책이 <책 읽는 삶>이다. 180쪽밖에 안 되는 얇은 책이라,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읽다가, 결국 단숨에 읽어 버렸다. 저자를 소개하는 안내를 읽으니 "《나니아 연대기》,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순전한 기독교》 등 수많은 인생에 감화를 끼치며 고전의 반열에 오른 명작들의 저자이자,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오랜 시간 영문학을 가르쳤던 존경받는 스승,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칭송받는 C. S. 루이스. 그는 매일 일고여덟 시간 책을 탐독하던 사람이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읽으면서 루이스는 다독가일 뿐 아니라 탐독가이며 읽은 내용 전부를 기억해 내는 엄청난 기억력의 소유자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점점 독서기억력이 떨어지고 있다.)
3.
내년도에는 <요즘 무슨 책을 읽어?>라는 코너를 만들어볼까 공상하고 있었는데, 루이스의 독서력이 자극이 되었다. 단편적인 글들을 모은 책이지만, 제법 알차고 기억할만한 구절이 많다. 밑줄 친 몇 부분을 소개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아를 지키고 더 강화하려는 일차적 충동이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아를 벗어 버리고 그 편협함을 바로잡아 외로움을 치유하려는 이차적 충동도 함께 갖고 있다. 바로 사랑, 덕행, 지식 추구, 예술 감상 등을 통해서 우리는 이 일을 한다. 이 과정은 자아의 확장이나 자아의 일시적 소멸로 표현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오래된 역설이다.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18쪽)
"우리 가운데 평생 진정한 독서가로 살아온 이들은 여간해서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의 존재가 엄청나게 확장된 것은 작가들 덕분이다. 좀체 책을 읽지 않는 친구와 대화해 보면 이 점에 제대로 와닿는다. 그는 아주 선량하고 사리 분별력도 꽤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사는 세계는 너무 작다. 우리라면 아마 그 속에서 숨이 막힐 것이다. 자기 자신만으로 만족하다가 결국 자아 이하가 된 사람은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같다."(21쪽)
"나이 들어서 유치하게 아이들 책을 읽는다고 비난받는 사람일수록 어렸을 때는 어른들 책을 읽는다고 비난받았다. 명실상부한 독사가치고 [인생] 시간표에 맞춰 책을 읽는 사람은 없다."(38쪽)
"동화 나라는 손닿지 않을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아련한 의식을 자극하면서 아이를 동요시키며 (평생 풍요롭게 해준다), 현실 세계에 무디어지거나 눈감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현실 세계에 새로운 차원의 깊이를 더해준다. 아이가 마법의 숲 이야기를 읽었다고 해서 진짜 숲을 멸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독서 덕분에 모든 진짜 숲에 약간의 마법이 걸린다. 이것은 특별한 동경이다."(44쪽)
"요즘 시대 책들은 그 내용이 옳은 경우에는 우리에게 이미 어설프게 알던 진리를 줄 뿐이고, 틀린 경우에는 이미 중병 수준인 우리의 과오를 가중시킬 뿐이다. 유일한 완화제는 우리 머릿속에 '역사의 시원한 바닷바람'을 계속 쬐는 것인데, 그러려면 고서를 읽어야만 한다."(56쪽)
"6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나는 더 넓은 세계를 보고픈 갈망조차 없을 만큼 나 자신이나 이 시대에 매료되지는 않았다. 해외로 떠나는 휴가를 관광객으로서만 보내는 일은 내게는 유럽을 낭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얻을 것이 그보다 많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지난 시대의 문학에 우리 자신의 얼굴만 비추어 보고 만다면 그것은 과거를 낭비하는 것 아닐까?" (124쪽)
"독창성을 떠받들어서는 아무도 독창적 존재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진실을 말하고, 작은 일에도 그 자체를 위해 최선을 다해 보라. 그러면 소위 독창성이 저절로 찾아온다."(134쪽)
4.
그는 친구 아서 그리브즈에서 좀 더 친밀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중 2개.
"책을 읽은 후에는 다른 사람과 함께 그 책에 관해 토론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고 봐. 때로 상당한 격론이 벌어진다 해도 말야." (154쪽)
"자고로 편지를 쓰는 이들의 특권은 차마 말로 하지 못할 부분까지 지면에 옮기고, 말보다 웅장하게 글에 담아내며, 자칫 대화 중에 놓치고 지나갈 감정도 자세히 설명할 수 있다는 거야." (155쪽)
책의 말미는 이렇게 끝난다.
"좋은 신발은 신고 있어도 느껴지지 않는 신발이네. 마찬가지로 좋은 독서는 시력이나 조명이나 인쇄상태나 맞춤법 따위를 의식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을 때 가능해지지." (173쪽)
5.
인용하다 보니 자판기로 필사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원래 독수리 타법에다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오른쪽 검지손가락이 아파 요즘은 두드릴 때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가운데 손가락이 고생하고 있다. 자판기가 뻑뻑해서 바꿔야 할까 보다. 여의도로, 여의도로 달려가는 내 마음을 붙잡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미 내 마음은 여의도에 가 있다. 부디 오늘 모두가 만세를 부르며 활짝 웃고, 눈물을 흘리며 껴안는 감격스러운 순간이 연출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