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힘이란 '공중에 매달릴 수 있는 능력' (결정짓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능력, 영어로는 'pending')을 의미합니다. 어려운 말일 수 있지만, 이는 일의적으로 정의되어 있지 않은 개념을 포함하는 논고를 계속 읽을 수 있는 힘을 뜻하고, 다른 말로 '지적 폐활량'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지적 폐활량이 풍부하면 '미결정', 즉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를 견디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57쪽)
한편 쓰는 힘을 갖춘다는 것은 자신의 '보이스'voice를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좀 낯선 단어지만 제가 말하는 '보이스'는 자기 생각과 감정을 명확하게 표현해서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는 문체라는 뜻이 아닙니다. 생각과 감정을 그것이 발생한 시점의 '성운 상태'로 포착할 수 있는 목소리이지요. 그래서 자신의 보이스를 가진 사람은 때때로 중얼거리기도 하고 그러다 잠시 멈추기도 하고 말을 바꾸거나 더듬거나 이미 뱉은 말을 철회할 수도 있습니다. (59쪽)
1.
김건희 특검은 부결되었고, 윤석렬 탄핵은 의결수 부족으로 무효가 되었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조합이 완성되었다. 나 대신 여의도로 대리출석한 후배작가의 열정과 촛불을 밝히며 기원한 나의 기도도 소용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분노를 삭이며 읽는다. 내가 명랑해져야 웃으며 저항할 수 있다. 즐겁게 저항해야 한다. 우울은 우리를 가라앉힐 뿐, 이번 사태를 피식 웃으며 훌쩍 넘겨야 한다. 그리고 새롭게 판을 짜고 축제처럼 춤추며 이 폭력에 맞서야 한다. 단식하지 말고, 든든하게 먹으면서 서로를 챙기면서 거리로 나서야 한다. 어리석음에 대항하는 방법은 낄낄 웃는 것이다.
2.
우치다 다쓰루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본의 무도가이자 철학자다. 나는 '거리의 철학자'인 그의 접근방식과 문체를 사랑한다. 그동안 내가 읽은 것은 일본독자를 1차 대상으로 삼은 것을 번역한 책이었지만, 이번에 나온 <무지의 즐거움>은 한국독자를 1차 대상으로 삼은 책이다. 세계에서 유일한 우치다 다쓰루 연구자를 자임하는 박동섭이 전문 연구자답게 우치다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우치다 다쓰루는 이 질문에 정직하고 다쓰루스러운 대답으로 정성껏 답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치다 선생과 박동섭이 기획하고 완성한 선물이라 할 수 있다.
3.
다루는 주제는 총 7묶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Ⅰ 배우는 태도 Ⅱ 배움의 밑천 Ⅲ 배움의 즐거움 Ⅳ 왜곡된 배움 Ⅴ 배움의 소임 Ⅵ 배움의 결실 Ⅶ 평생 배움의 길"이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배움이다. 그렇다면 핵심어인 배움을 우치다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우치다는 배움은 양적 성장, 모자란 것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배운다'는 것은 한마디로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122쪽)
"배운다는 것은 배운 후에 배우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배우기 전에는 자신이 무엇을 배우는 지도 물랐던 것을 배운 후에 회고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 배움의 역동성과 개방성 그리고 풍요로움입니다.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는 배움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 뿐입니다." (131쪽)
4.
나는 읽고 쓰는 사람이라 그와 관련된 우치다의 목소리를 처음에 소개하였지만, 사실 각 장마다 읽을거리가 풍부하다. 이 책은 우치다의 정수를 다양하게 맛볼 수 있는 압축적이고 훌륭한 책이다. 아래는 밑줄 쳐 놓은 부분의 일부이다.
"저는 자본주의 폭주를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일단 '코뭔commune의 재생'입니다. 공동체에 속하는 누구라도 접근할 수 있는 '공유지'를 다시 한번 소생시키는 일, 사유를 억제하고 가능한 많은 자원을 공동체가 공유하고 공동관리하는 것, 그런 풍습을 사회에 확정해 가는 것, 그것이 저의 정치적 목표입니다. 개풍관은 제가 손수 만든 코뮌입니다. 저 나름의 정치적 실천이지요. 어떤 기성 정당의 강령과도 관계가 없다는 점에서 지극히 사적인 일입니다."(166~167쪽)
"지성은 어려운 개념이나 이론을 말할 때가 아니라 복잡하고 까다로운 이야기를 알기 쉽게 설명할 때 그 독창성을 제대로 발휘합니다." (179쪽)
"철학의 사명은 인간의 지성을 활성화하는 일이라는 말씀드렸는데요. 종교적인 성숙을 위한 과정도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물음 앞에 멈춰 서는 것입니다. 비유는 일종의 수수께끼입니다. '바로 대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쩐지 집중하면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저는 제 독자가 그런 상태이기를 바랍니다." (199쪽)
5.
우치다 선생은 '민주주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저는 민주주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아직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란 '그것을 이 세계에 실현하려는 수행적 노력'이라는 형태로, 항상 미완으로밖에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한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노력이란 원래 이런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하더라도, 혹 그 목표를 추구하다가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고 죽더라도 저는 불만이 없습니다." (203쪽)
그리고 그 민주주의의 핵심인 '주권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이것을 '자기 개인의 운명과 나라의 운명 사이에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것 또한 저 개인의 정의로, 일반적이지 않지만, 어쨌든 이 정의로 이야기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 즉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과 나라를 바꾸는 것은 하나'라고 믿을 수 있는 것. 그것이 민주제 국가에서 생활하는 주권자의 조건입니다." (205, 206쪽)
6.
우치다는 무지의 즐거움을 즐기는 사람, 자신의 삶을 나라의 삶과 연관 지을 수 있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본에서는 이런 어른이 필요하다면서 한국에서도 어른이 많아지길 기대하고 있다.
"지금 한국이 집단으로서 성숙을 향해 가고 있다면 이웃 나라 사람으로서 그만큼 기쁜 일은 없을 겁니다. 저는 한일 양국의 우정과 연대가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안정을 위해 필수라는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일은 일본인들을 향해 '어른이 되어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주변을 향해 '어른이 되어 달라'고 간청해 주세요. 두 나라에서 함께 일어날 이 간청 활동이 지금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 밑거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50쪽)
7.
나는 이 책을 탄핵이 무효화된 후에 붉은 눈으로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책 맨 끝에 연필로 이렇게 또박또박 써놓았다. "탄핵은 부결되었다. 분노를 삼키며 지성을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