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철학은 쓸모가 있다. 철학은 백면서생의 사치도 전유물도 아니다. 또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행복을 예찬하지 않는다. 오히려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어떤 것도 사유하지 않는다. 철학의 쓸모는 두 가지다. 하나는 여러 질병으로 고통받는 우리에게 진단과 소견을 제공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는 우리가 실제로는 병에 걸린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철학이 없다면 질병은 절대 발견되지 않을 것이고, 증상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이 특별한 조직 검사, 즉 철학적 검진은 의사도, 심리학자도, 심지어 우리 자신도 감지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해 낸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가까운 사람과의 불화, 직업적 실패, 삶에 대한 염증 등 우리의 여러 고통을 진정시켜 주는 진통제 같은 역할을 하는 철학은 그 분야만의 다양한 진정제와 연고를 처방해 주는 일종의 의학이라 할 수 있다. (12쪽)
- '머리말' 중에서
1.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철학의 쓸모>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책은 두 권이다. 하나는 이미 절판된 내가 쓴 <철학의 쓸모>(2016)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삶은 흐른다>라는 저서로 유명한 로랑스 드빌레르가 쓴 <철학의 쓸모>(2024)이다. 드빌레르가 쓴 철학의 저술은 벌써 5쇄를 지나가고 있다. (부럽다.)
다행히 내가 쓴 <철학의 쓸모>도 큰글자 책으로 재출간되어 있다. 내 책은 동서양 철학자를 비교한 책이고, 드빌레르가 쓴 책은 살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문제들을 철학적으로 처방해 주는 실용서(?)다. 효용성이 내 책보다 월등히 높다. (많이 팔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2.
구성도 알차다. 목차만 읽어도 구입각이다. 머리말에 "삶은 결코 만만치 않다"라고 살짝 압력을 가한 후, '내 삶의 치유법'으로 이 책을 사용하라고 유혹한다. 그리고 크게 육체의 고통, 영혼의 고통, 사회적 고통, 흥미로운 고통 등 4부로 고통을 구분하고 그에 해당하는 세부항목에 따른 철학자들의 처방전을 발급한다. 예를 들면 질병에 대하여 질병을 마치 전쟁상황에 비유하여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무엇으로 설명하는 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비유에 가까운 것인데, 그 비유 자체가 문제일 경우에는 질병의 은유에 저항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수전 손택은 처방한다. (고개가 끄덕여지며, 내 질병을 바라본다.)
3.
목차를 보자. 목차만으로 유혹당하리라. 나도 목차 때문에 샀으니까.
PART 01 _ 육체의 고통 육체에 대하여 자크 데리다의 철학 처방전 - 고양이의 시선을 대면하기 죽음에 대하여 철학 처방전 - 마음을 환기하기 질병에 대하여 수전 손택의 철학 처방전 - 질병의 은유에 저항하기 고통에 대하여 폴 리쾨르의 철학 처방전 - 하소연하기 늙음에 대하여 한나 아렌트의 철학 처방전 - 새로운 것에 뛰어들기 열정에 대하여 스토아학파의 철학 처방전 - 열정을 거부하기 쾌락에 대하여 알베르 카뮈의 철학 처방전 - 한낮의 투명함으로 현실 보기 뇌와 정신에 대하여 데카르트의 철학 처방전 - 명료한 개념으로 사유하기
PART 02 _ 영혼의 고통 영혼에 대하여 산다는 것에 대하여 라이프니츠의 철학 처방전 - 자기만의 삶을 쌓아가기 일상에 대하여 니체의 철학 처방전 - 단기적 습관을 추구하기 의지박약에 대하여 파스칼의 철학 처방전 - 무의식 이용하기 두려움과 공포에 대하여 스피노자의 철학 처방전 - 인과율 인식하기 사랑에 대하여 루크레티우스의 철학 처방전 - 자유롭게 사랑하기 위로에 대하여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철학 처방전 -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후회와 자책에 대하여 몽테뉴의 철학 처방전 - 몰두하며 온전해지기 우울과 권태에 대하여 첫눈에 빠지는 사랑에 대하여 질투와 시기심에 대하여 과오, 죄, 양심의 가책에 대하여 칸트의 철학 처방전 - 도덕적 명령을 따르기 실패, 낙오, 좌절에 대하여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자아 성찰에 대하여 광기에 대하여 고독과 고립에 대하여 자살에 대하여
PART 03 _ 사회적 고통 노동에 대하여 니체의 철학 처방전 - 불성실한 일꾼 되기 사회 규범에 대하여 토머스 홉스의 철학 처방전 - 리바이어던에 대한 생각 돈에 대하여 철학 처방전 - 철학은 돈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거리 유지에 대하여 대화에 대하여 자녀, 친구, 가족에 대하여 직장 생활에 대하여
그리고 _ 흥미로운 고통들 운동의 지나침에 대하여 나이듦에 대하여 육체와 영혼의 연결에 대하여 소소한 쾌락에 대하여 먹는 것에 대하여 현재의 행복에 대하여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하여 영화에 대하여
4.
읽고 나서 아쉬운 점은 뒤로 갈수록 밀도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실의 문제를 빠짐없이 꼼꼼하게 검토하려는 성실성으로 읽는다면 그조차 괜찮다고 생각한다. 자세한 팁도 중요하지만 고민되는 지점에 대하여 나름 언급하려는 모습으로 생각한다면 저자가 많은 부분을 철학적으로 검토했구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5.
읽은 부분 중에서 밑줄 친 부분을 소개한다.
철학은 정원 가꾸기나 독서 같은 유유자적한 활동이 아니다. 산다는 행위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위험한 것을 대면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철학은 앞서 말한 것처럼 삶을 투우에 비교한다. 그래서 철학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주하지 말고 우리를 짓뭉갤지도 모르는 대상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싸우라고 말한다. 투우사의 현란한 몸짓과 화려한 복장, 유혈이 낭자한 소와의 결투에서 어떤 아름다움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꿈과 상상이라는 베일로 어두운 현실을 가리기 위해 아무리 갖은 애를 써도 우리는 삶에서 어떤 아름다움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23쪽)
스토아철학이 제시하는 치료의 원리는 단순하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세상사는 그 자체로 비극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비극이라 판단할 때 비극이 된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일어나는 일들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데 방해가 되는 쓸데없는 두려움과 헛된 희망을 버리는 것이다. (27, 28쪽)
철학을 마음에 위안을 주는 메시지나 요가 명상으로 소비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철학은 본래 극도로 고통스럽고 괴로운 학문이다. 철학은 토론의 기술도, 감정의 공유도 아닌 이성으로 개념을 생산하는 일종의 '개념 제작소'다. (...) 생각한다는 것은 고행을 자처하는 것이며,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성급하게 자신의 평가와 신념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109쪽)
아래 대목에서는 철학적 처방에 웃음이 나온 부분이다.
의지박약을 고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나를 구원해주지 못하는 의지에 기대는 대신 실질적으로 나를 도울 수 있는 장치를 이용하는 것이다.(오디세우스가 돛대에 자신을 결박하는 것처럼.)
그 장치가 혹독하고 엄격할수록 효과는 더욱 커진다. 스스로에게 의무를 지우고, 족쇄를 채우고, 강제하고, 자신의 입을 봉하는 것, 이 모든 장치가 취약한 우리의 의지를 보완해 준다. 그러므로 케이크를 세 입만 먹겠다고 결심하기보다 아예 케이크를 사지 말고, 공과금을 연체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기보다 미리 자동납부를 신청해두는 편이 의지에 기대는 것보다 훨씬 나은 방법이다. (142~3쪽)
검은 고양이가 지붕 위를 지나고 있는데 기왓장 하나가 행인의 머리로 떨어진다면,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지붕을 수리하는 것이다. (154쪽)
6.
오늘은 두 번째로 의회에서 탄핵을 결정하는 날이다. 오늘 4시까지는 가슴이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다. 내 마음에 촛불을 켜고, 추위를 탄핵을 위한 열정으로 이겨내고 있는 거리의 시민들에게 연대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