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지음 (어크로스, 2025)
한국인이라면 다들 알고 있다. 곰은 어두운 곳에서 마늘을 먹고 견딘 끝에 마침내 웅녀가 되었고, 환웅과 짝을 지어 단군왕검을 낳는다. 이 단군왕검은 어떻게 되었나? 무려 1500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렸는데, 중국으로부터 기자라는 이가 조선 땅에 건너오자 자리를 피해 결국 산신이 된다. 이처럼 한국의 정체성에는 아주 일찍부터 이주, 식민, 제국의 시선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 한국의 정체성은 바로 그런 시선들과 길항하며 전개되었다. 단군신화는 제국을 의식한 정치신학이다. (26쪽, 세상에 홍익인간이라니)
21세기의 한국은 정치의 실패이자, 헌정의 실패이자, 법치의 실패이자, 정당의 실패이자, 선거의 실패이자, 교육의 실패이자, 언론의 실패이자, 사회의 실패에 그치지 않고, 한국을 이해해온 방식의 실패이기도 하다. 안이한 언어와 게으른 상상력에 의존해온 기존 이해 방식의 실패다. 이제 한국을 다시 생각할 때가 왔다. 한국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다시 숙고할 때가 왔다. 한국을 이해할 언어를 새롭게 발명할 때가 왔다. (15쪽, 프롤로그)
1.
"거침없는 상상력과 정교한 논리, 리듬감 있는 문장으로 독자를 깊은 사유의 장으로 이끌어온 서울대 김영민 교수"라고 저자를 평가하는 글을 봤다. 일단 동의! 하지만 나는 김영민의 글을 읽을 때마다 경쾌한 문장으로 빚어낸 냉소와 역설의 대가라고 생각한다. 그는 진지한 문제를 진지하지 않은 문체로, 진지하지 않은 방식으로 써 내려간다. 문장의 양지가 밝을수록 음지도 더욱 짙게 드러나는 법이라, 그의 글을 경쾌하고, 또 그만큼 아프다. 뼈를 때린다. 그런데 그렇게 다시 추려진 뼈가 시원하다. 정치사상가가 이런 문체를 갖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닮고 싶다.
2.
2018년 말에 출간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는 역설적 제목의 위트와 풍자가 넘치는 에세이를 읽으면서부터 그의 애독자가 되었다. 이후로 그가 쓴 책이라면 에세이든 학술서든 모두 구입하여 읽고 있다. 이번에 나온 신간 <한국이란 무엇인가>는 계엄과 탄핵 정국에 나왔기에 시기적으로 급조한 책은 아닌가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2022년부터 쓴 글을 모은 책이었다. 그것이 오히려 책에 신뢰감을 주었다. 급조된 책은 순도와 밀도가 떨어지기 십상이라.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가 한국의 과거, 2부가 한국의 현재 3부가 한국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그에 어울리는 글들을 배치했다. 읽는 글 하나하나 명문이고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여 기분이 좋았다. 이런 책이라면 하루에 10권이라도(^^) 읽고 싶다. 하지만 짧게 쓴 글이 밀도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글을 짧게 촌철살인처럼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게다가 문학적 문체로 압축된 듯한 글의 말미는 얼마나 상쾌했는지.
3.
그는 자신만의 문체를 가진 에세이스트이자, 전방위적으로 사유를 하는 학자로서의 성실함이 있다. 그래서 문체는 가볍되, 주제의식은 무거운 이중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밑줄 그은 곳은 많지만, 그의 글을 직접 읽어보라고 권한다. 그의 글은 밀가루보다 앙꼬가 많은 찐빵이다. 그래도 맛보기로 몇 구절 소개한다.
그때서야 작은 깨달음이 왔다. 그렇군, 유교랜드는 과거의 한국 문화를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현대 한국을 보여주는 곳이군. 프랑스의 사상가 장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거기 있다고 말한 적이 있지. 유교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한국 전체가 유교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안동에 있는 것이 아닐까. 꼭 과거에 존재했던 문화라기보다는 현대 한국이 발명한 ‘유교’의 랜드. (98쪽, 유교랜드)
쿠데타는 단순히 법을 어기는 행위가 아니다. 누가 노상방뇨를 한다? 그것은 위법일 수는 있어도 쿠데타는 아니다. 누가 소매치기를 한다? 그는 잡범이지 쿠데타 수괴가 아니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법을 어기는 것이 쿠데타가 아니라 법을 초월하는 것이 쿠데타다. 그래서 미셸 푸코는 쿠데타 상황에서 국가이성은 “법 자체”에 명령한다고 말했다. 법을 어기고 지키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권위 자체에 도전하는 것이 쿠데타의 본질이다. (137쪽, <서울의 봄>과 쿠데타)
아도르노는 주어진 선택지나 이야기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편끼리 놀아나지 않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끼리끼리 모여 서로 ‘우쭈쭈‘ 해주다 보면, 자기와 다른 모든 의견은 ˝성가신 저항, 사보타주, 자기 밥그릇을 빼앗아갈 계략˝ 정도로 여겨지게 된다. 그 결과, ˝풍요로운 대조를 만들 능력, 모순을 감싸 안으면서 현재의 자신을 넘어설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만다.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패거리 의식은 심각한 자해행위다. 자기 심장에 박힌 치명적인 칼이다.(254쪽, 주어진 선택지에 갇히지 말기를 기원한다)
4.
책의 내지에 김영민의 글씨로 "이제 한국을 다시 생각할 때가 왔다"라고 쓰여있다. 김영민의 권유가 아니라도, 우리는 내란 이후 너무 많은 생각에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물론 생각이 많아졌다고 다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요즘은 매일 다시 생각할 새로운 화두가 강제로 던져진다.) 한 고비 넘기면 다시 두 고비가 보인다. 이렇게 긴장되게 사니 삶의 질을 좋아질 리가 없다. 초주검이 된 정신에 언감생심 독서라니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글을 읽어야 긴장을 풀 수 있는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 가장 정신이 없을 때, 가장 많은 독서를 한다. 저주인가, 축복인가.
김영민의 신간은 이 많은 생각에 윤활유를 붓고, 뻑뻑한 사유를 부드럽게 하는 효과가 있다. 내란으로 머리가 아프다면, 한국의 현재와 미래가 걱정된다면, 김영민의 신간을 읽어보라. 답답함이, 가슴에 얹힌듯한 체기가 조금은 뚫릴 것이다. 그건 보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