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년기(1818-1843): 철학적 형성기
1818년 5월 5일, 프로이센 라인란트의 작은 도시 트리어에서 태어난 칼 마르크스는 유복한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어요. 아버지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성공한 변호사였고, 어머니 헨리에테는 네덜란드 출신의 유대인이었죠. 마르크스 가족은 원래 유대교도였지만, 아버지가 직업상의 이유로 개신교로 개종했어요.
1835년 17세의 마르크스는 본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어요. 하지만 곧 베를린 대학교로 전학했는데, 이곳에서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베를린 대학교는 당시 독일 철학의 중심지였고, 특히 헤겔 철학의 본거지였거든요. 마르크스는 처음에는 헤겔 철학에 반감을 가졌지만, 점차 그 매력에 빠져들었어요.
베를린에서 마르크스는 '헤겔 좌파'라고 불리는 젊은 철학자들의 모임에 참여했어요. 이들은 헤겔의 철학을 더 급진적으로 해석해서 기존 사회를 비판하는 도구로 사용하려고 했어요. 특히 브루노 바우어, 막스 슈티르너 같은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마르크스의 비판적 사고가 형성되었어요.
1841년 마르크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박사논문을 완성했어요. 이 논문에서 마르크스는 에피쿠로스의 '클리나멘' 개념을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와 능동성을 강조했어요. 이는 나중에 그의 실천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죠.
박사학위를 받은 후 마르크스는 대학교수가 되려고 했지만, 그의 급진적 사상 때문에 불가능했어요. 대신 1842년 쾰른에서 발행되던 『라인 신문』의 편집장이 되었어요. 이 신문은 라인 지역의 자유주의 부르주아들이 만든 것으로, 프로이센 정부의 검열과 억압에 맞서는 진보적 신문이었어요.
『라인 신문』에서 일하면서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현실 정치와 사회 문제에 직접 부딪혔어요. 나무 도둑 처벌법, 모젤 지역 농민들의 궁핍 문제 등을 다루면서 경제적 이해관계의 중요성을 깨달았어요. 이때의 경험이 마르크스로 하여금 철학에서 경제학으로 관심을 돌리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어요.
하지만 마르크스의 급진적 기사들 때문에 『라인 신문』은 정부의 탄압을 받았고, 결국 1843년 3월 폐간되었어요. 이 시기 마르크스는 헤겔의 『법철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헤겔 법철학 비판」을 집필했어요. 이 저작에서 마르크스는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하고,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했어요.
또한 이 시기에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도 발표했는데, 여기서 마르크스는 정치적 해방과 인간적 해방을 구별하면서 진정한 해방의 조건을 탐구했어요. 이는 나중에 그의 공산주의 이론의 기초가 되었죠.
1843년 마르크스는 4년간 사귀어온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했어요. 예니는 마르크스보다 4살 위의 귀족 출신 미인으로,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결혼이었어요. 신혼부부는 곧 파리로 떠났는데, 이는 마르크스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어요.
2. 파리 시기(1843-1845): 사회주의자로 전환
1843년 가을 파리에 도착한 마르크스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어요. 파리는 당시 유럽의 혁명 수도였고, 온갖 사상가들과 혁명가들이 모여드는 곳이었거든요. 마르크스는 여기서 아르놀트 루게와 함께 『독불연보』라는 잡지를 발행하려고 했지만, 자금 부족으로 한 호만 내고 폐간되었어요.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진짜 노동자들을 만났어요. 독일에서는 주로 대학생들과 지식인들과만 어울렸는데, 파리에서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수공업자들과 직접 대화할 수 있었거든요. 특히 독일인 수공업자들의 모임에 자주 참석하면서 노동자들의 실제 생활과 의식을 접할 수 있었어요.
이 경험은 마르크스에게 충격적이었어요. 한 독일인 목수가 "우리는 하루 12시간씩 일해도 겨우 먹고살 정도밖에 못 벌어요. 그런데 공장 주인은 우리가 만든 가구를 팔아서 엄청난 돈을 벌거든요. 이게 공평한가요?"라고 물었을 때, 마르크스는 제대로 답할 수 없었어요. 철학 공부는 많이 했지만, 경제학은 거의 몰랐거든요.
그래서 마르크스는 본격적으로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어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데이비드 리카도의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 장 바티스트 세이의 경제학 저작들을 읽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이 책들을 읽으면서 마르크스가 느낀 것은 답답함이었어요.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를 마치 자연법칙처럼 설명했지만, 정작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거든요.
1844년 여름 마르크스는 「경제학-철학 수고」를 집필했어요. 이 저작에서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을 시도했어요. 특히 '소외' 개념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왜 불행한지, 왜 자신이 만든 세상에서 이방인처럼 살아가는지를 분석했어요.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과, 노동의 결과물과, 다른 사람들과,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멀어진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진단이었어요.
1844년 8월 마르크스는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어요. 프리드리히 엥겔스와의 재회였죠. 두 사람은 이전에 베를린에서 잠깐 만난 적이 있었지만, 이때는 별로 친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파리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완전히 달랐어요. 엥겔스는 영국 맨체스터에서 아버지의 방직공장을 관리하면서 노동자들의 실상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거든요.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영국 공장의 끔찍한 현실을 생생하게 들려줬어요. 어린아이들이 하루 14시간씩 일하고, 공장 안은 먼지와 소음으로 가득하고, 노동자들은 지하실 같은 곳에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였죠. 또한 엥겔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개요』라는 글을 써서 마르크스에게 보여줬는데, 이 글에서 자본주의 경제학의 모순들을 날카롭게 지적했어요.
두 사람은 금세 의기투합했어요. 마르크스는 철학적 깊이가 있었고, 엥겔스는 현실 감각이 뛰어났거든요. 서로의 장점을 보완할 수 있는 완벽한 파트너였어요. 이때부터 40년간 지속될 위대한 우정과 협력이 시작되었어요.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또한 다양한 사회주의자들과 만났어요. 프루동, 바쿠닌, 하이네 등과 교류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이해를 깊게 했어요.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들의 한계도 명확히 보았어요. 대부분이 감정적이고 도덕적인 비판에 머물러 있고, 과학적 분석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파리에서의 행복한 시간도 오래가지 못했어요. 1845년 초 프로이센 정부가 프랑스 정부에 압력을 넣어서 마르크스를 추방하라고 요구했거든요. 마르크스가 『전진!』이라는 독일어 신문에 기고한 글들이 너무 급진적이었던 거예요. 결국 마르크스는 아내 예니, 갓 태어난 딸과 함께 벨기에 브뤼셀로 떠나야 했어요.
3. 브뤼셀 시기(1845-1848): 이론적 기초 확립
1845년 2월 브뤼셀에 도착한 마르크스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어요. 벨기에 정부는 마르크스에게 정치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했거든요. 물론 마르크스는 이 약속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브뤼셀에서 그는 자신의 이론을 완성하고 실천 활동을 본격화했어요.
브뤼셀에 정착한 마르크스는 곧 엥겔스와 재회했어요. 엥겔스는 영국에서 돌아와서 독일 바르멘에 있는 아버지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마르크스의 소식을 듣고 브뤼셀로 찾아온 거예요. 두 사람은 파리에서 만난 이후 편지를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아왔거든요.
1845년 봄 마르크스는 중요한 작업을 했어요. 바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작성한 거예요. 이 11개의 짧은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명확히 했어요. 특히 마지막 11번째 테제인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는 마르크스 철학의 핵심을 보여줘요.
1845년 여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함께 영국 여행을 떠났어요.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영국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마르크스는 맨체스터의 공장들을 둘러보면서 충격을 받았어요. 파리에서 만난 독일인 수공업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대규모 산업이 펼쳐져 있었거든요.
영국에서 돌아온 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동 작업을 시작했어요. 바로 「독일 이데올로기」 집필이었어요. 이 책의 목적은 두 가지였어요. 첫째, 헤겔 좌파 철학자들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 둘째, 자신들의 새로운 철학인 '역사적 유물론'을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것이었죠.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역사를 보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어요. 기존의 철학자들이 역사를 '정신'이나 '이념'의 발전 과정으로 봤다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물질적 생활 조건이 역사를 움직인다고 주장했어요.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는 유명한 명제도 이 책에서 처음 나왔어요.
하지만 이 작업은 생각보다 어려웠어요. 두 사람이 함께 쓰다 보니 문체도 다르고, 강조점도 달랐거든요. 게다가 분량도 계속 늘어났어요. 처음에는 간단한 비판문을 쓰려고 했는데, 결국 700페이지가 넘는 대작이 되어버렸어요. 더 큰 문제는 출판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내용이 너무 급진적이어서 어떤 출판사도 출간을 꺼렸거든요.
1847년 마르크스는 중요한 조직에 가입했어요. 바로 '공산주의자 동맹'이었죠. 이 조직은 원래 '정의자 동맹'이라는 이름의 독일인 수공업자들의 비밀결사였어요. 파리, 런던, 브뤼셀 등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던 독일인 노동자들과 수공업자들이 만든 조직이었죠.
공산주의자 동맹의 지도자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겼어요. 조직의 강령을 작성해달라는 것이었죠. 기존에는 추상적인 정의와 평등을 추구한다는 막연한 목표만 있었는데, 이제는 더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강령이 필요했던 거예요.
마르크스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어요. 그동안 「독일 이데올로기」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통해 자신만의 철학을 정립해왔지만, 아직 일반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거든요. 이번 기회에 자신의 사상을 널리 알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1847년 12월부터 마르크스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마감 시한이 촉박했어요. 1848년 2월까지 완성해야 했거든요. 게다가 마르크스는 완벽주의자여서 한 문장 한 문장을 여러 번 고쳐 썼어요.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재촉하는 편지를 계속 보냈어요.
드디어 1848년 1월 말, 마르크스는 원고를 완성했어요. 총 23페이지의 짧은 문서였지만, 그 안에는 인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미래에 대한 비전이 담겨 있었어요. 바로 「공산당 선언」이었죠.
「공산당 선언」은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해요. 이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계급투쟁론,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 사유재산 폐지, 국제주의 등 자신들의 핵심 사상을 명확하게 제시했어요.
브뤼셀 시기는 마르크스에게 이론적 완성의 시기였어요. 헤겔 철학에서 출발해서 포이어바흐를 거쳐 독자적인 역사적 유물론을 확립했고, 공산주의 이론을 체계화했어요. 또한 엥겔스와의 협력을 통해 평생의 동반자를 얻었고, 공산주의자 동맹을 통해 국제적 노동 운동과 연결되었어요.
4. 혁명 시기(1848-1849): 실천적 참여
1848년 2월 24일, 파리에서 혁명이 터졌어요. 루이 필리프 왕이 왕좌에서 쫓겨나고 공화정이 선포되었거든요. 이 소식이 유럽 전체에 번개처럼 퍼져나갔어요. 마치 「공산당 선언」의 예언이 현실이 되는 것 같았죠.
브뤼셀에 있던 30살의 마르크스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어요. 드디어 이론이 현실이 될 때가 온 것 같았거든요. 마르크스는 즉시 행동에 나섰어요.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 6,000프랑을 모두 혁명 자금으로 내놓았어요. 그리고 벨기에에 있던 독일인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려고 했죠.
하지만 벨기에 정부는 마르크스의 활동을 위험하게 봤어요. 3월 3일, 경찰이 마르크스의 집에 들이닥쳤어요. "24시간 내에 벨기에를 떠나라"는 추방 명령이었죠. 마르크스는 아내 예니, 딸들과 함께 급히 짐을 쌌어요. 예니는 임신 중이었는데도 말이에요.
마르크스 일가족은 파리로 향했어요. 파리에서는 임시정부가 들어서 있었고, 사회주의자들도 정부에 참여하고 있었어요.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독일인 혁명가들과 만났어요. 이들은 독일에서도 혁명을 일으키자고 주장했어요.
하지만 마르크스는 신중했어요. 독일의 상황이 프랑스와는 다르다고 봤거든요. 독일은 아직 통일도 되지 않은 상태였고, 봉건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마르크스는 우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4월,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독일로 돌아갔어요. 목적지는 쾰른이었어요. 쾰른은 라인 지역의 중심 도시였고, 마르크스가 예전에 『라인 신문』을 발행했던 곳이기도 했어요. 마르크스는 여기서 새로운 신문을 발행하기로 결심했어요.
『새 라인 신문』이 바로 그것이었어요. 부제는 '민주주의 기관'이었죠. 마르크스는 이 신문을 통해 독일 혁명을 지도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자금 조달이 쉽지 않았어요. 마르크스는 자신의 유산을 모두 털어넣었고, 예니도 자신의 보석을 팔았어요.
『새 라인 신문』은 1848년 6월 1일 창간되었어요. 마르크스가 편집장을 맡았고, 엥겔스를 비롯한 여러 동지들이 기자로 참여했어요. 이 신문은 독일에서 가장 급진적인 신문이었어요. 왕정을 비판하고, 공화정을 지지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옹호했거든요.
마르크스는 이 신문을 통해 1848년 혁명의 전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했어요. 파리의 6월 봉기, 빈의 10월 혁명, 베를린의 3월 혁명 등을 자세히 분석했죠. 특히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혁명을 해석한 것이 특징이었어요.
하지만 혁명은 마르크스의 기대와 다르게 흘러갔어요. 부르주아들이 노동자들과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동 세력과 타협하기 시작한 거예요. 특히 파리에서 일어난 6월 봉기가 진압된 후, 유럽 전체의 혁명 분위기가 급속히 식어갔어요.
마르크스는 이런 상황을 날카롭게 분석했어요.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 혁명을 배신했다고 비판했죠. 『새 라인 신문』의 논조도 점점 더 급진적이 되어갔어요. 결국 프로이센 정부는 이 신문을 탄압하기 시작했어요.
1849년 5월, 『새 라인 신문』은 결국 폐간되었어요. 마지막 호는 빨간 잉크로 인쇄되었어요. 마르크스의 작별 인사였죠. "우리는 떠나지만, 우리의 마지막 말은 언제나 어디서나 노동계급의 해방이다!"
마르크스는 다시 망명길에 올라야 했어요. 이번에는 런던이었어요. 1848년 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마르크스에게는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이론과 실천이 만나는 순간을 직접 체험했고, 혁명의 복잡한 역학을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
5. 런던 망명 시기(1849-1883): 학문적 완성
1849년 8월 런던에 도착한 마르크스는 이곳에서 인생의 마지막 34년을 보내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몇 년 후면 독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런던이 그의 마지막 거주지가 되었죠.
런던에서의 초기 생활은 매우 어려웠어요. 1848년 혁명의 실패 이후 유럽 전체가 반동의 시대에 접어들어 있었고, 정치 활동은 거의 불가능했어요. 마르크스는 경제적으로도 극도로 궁핍했어요. 가족들은 소호 지역의 작은 방 두 개짜리 집에서 살았고, 때로는 집세를 못 내서 쫓겨날 뻔하기도 했어요.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마르크스를 구해준 것은 엥겔스의 우정이었어요. 엥겔스는 맨체스터에서 아버지의 사업을 도우면서 마르크스 가족을 경제적으로 지원했어요. 또한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기고하는 원고료도 중요한 수입원이었어요.
1850년대 마르크스는 주로 대영박물관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어요. 하루 10시간씩 경제학 연구에 몰두했거든요. 아담 스미스, 리카도 같은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저작을 읽고, 영국 정부의 공식 통계 자료들을 분석했어요. 이 시기의 연구가 나중에 『자본론』의 기초가 되었어요.
1852년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발표했어요. 이는 1851년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분석한 작품으로, 마르크스의 정치 분석 능력이 절정에 달한 걸작이었어요.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라는 유명한 문장도 이 책에서 나왔어요.
1857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공황이 유럽으로 번져오자, 마르크스는 다시 혁명의 가능성을 보았어요. 그는 미친 듯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때 작성한 원고가 바로 「정치경제학비판 요강(그룬트리세)」이었어요. 1857년 10월부터 1858년 5월까지 약 7개월 동안 8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원고를 작성했어요. 이는 『자본론』의 첫 번째 초안이자 마르크스 경제학의 보고였어요.
1859년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출간했어요. 이는 그가 세상에 내놓은 첫 번째 본격적인 경제학 저작이었어요. 비록 상품과 화폐만 다뤘지만, 여기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방법론과 역사적 유물론의 핵심 원리를 체계적으로 제시했어요.
1861년부터 1863년까지 마르크스는 「잉여가치학설사」를 집필했어요. 이는 아담 스미스부터 당대의 경제학자들까지 모든 경제학 이론을 체계적으로 검토하고 비판하는 작업이었어요. 마르크스는 경제학사 전체를 '잉여가치' 개념을 중심으로 재구성했어요.
1864년 마르크스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어요.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 창립에 참여하게 된 거예요. 마르크스는 협회의 창립 선언문과 규약을 작성했고, 곧 협회의 핵심 인물이 되었어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구호가 다시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어요.
국제노동자협회를 통해 마르크스는 미국 남북전쟁, 폴란드 독립 운동 등 국제적 사안들에 대해 발언했어요. 특히 1871년 파리 코뮌이 일어났을 때는 「프랑스 내전」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해서 코뮌을 열렬히 옹호했어요.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을 "노동계급 정부의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라고 평가했어요.
하지만 마르크스의 가장 큰 과업은 『자본론』 완성이었어요. 1860년대 들어 마르크스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작업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간 질환, 종기, 기관지염으로 고생하면서도 하루 12시간씩 글을 썼어요.
드디어 1867년 9월 『자본론』 1권이 출간되었어요.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편지를 써서 "이 책이 부르주아지에게 날리는 가장 무서운 미사일이다"라고 자신감을 표했어요. 실제로 『자본론』은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서가 되었어요.
1875년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비판」을 집필했어요. 독일의 두 사회주의 정당이 통합하면서 만든 강령을 비판한 것인데, 여기서 마르크스는 미래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가장 구체적으로 서술했어요.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라는 공산주의의 분배 원칙도 이 글에서 처음 명확하게 제시되었어요.
1870년대 후반부터 마르크스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어요. 1881년 아내 예니가 세상을 떠났고, 1883년 1월에는 큰딸 예니까지 잃었어요. 마르크스는 깊은 슬픔에 빠졌고, 건강도 급속히 나빠졌어요.
1883년 3월 14일 오후, 마르크스는 런던 자택의 안락의자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어요. 향년 64세였어요. 장례식에는 소수의 친구들만 참석했지만, 엥겔스는 추도사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마르크스는 무엇보다도 혁명가였다. 어떤 형태로든 지배계급의 타도에 참여하는 것, 그가 발견한 이론으로 프롤레타리아를 계몽하는 것, 이것이 그의 진정한 사명이었다."
마르크스는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살아남았어요. 엥겔스는 친구의 유언을 받들어 『자본론』 2권(1885)과 3권(1894)을 편집해서 출간했어요. 20세기에 들어서는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 등을 통해 마르크스의 사상이 현실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런던에서의 34년은 마르크스에게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가장 생산적인 시기였어요. 경제적 어려움과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학문적 과업을 완성했어요. 『자본론』을 비롯한 주요 저작들이 모두 이 시기에 완성되었고, 국제 노동 운동의 지도자로서도 활약했어요. 마르크스는 진정으로 "이론과 실천을 통일"시킨 혁명가였던 거죠.
● 칼 마르크스 생애 연대기
1818년 - 5월 5일 프로이센 라인란트 트리어에서 출생
1835년 - 본 대학교 법학과 입학
1836년 - 베를린 대학교로 전학, 헤겔 철학에 심취
1841년 -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로 박사학위 취득
1842-1843년 - 『라인 신문』 편집장으로 활동
1843년 -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 파리로 이주. 「헤겔 법철학 비판」 집필.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 발표
1844년 - 파리에서 엥겔스와 만남. 「경제학-철학 수고」 집필
1845년 - 프랑스에서 추방, 브뤼셀로 이주.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작성. 엥겔스와 함께 「독일 이데올로기」 집필 시작
1847년 - 공산주의자 동맹 가입
1848년 - 「공산당 선언」 발표 (엥겔스와 공저). 1848년 혁명 참여, 쾰른에서 『새 라인 신문』 발행
1849년 - 독일에서 추방, 런던으로 이주
1852년 -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발표
1857-1858년 -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그룬트리세)」 집필
1859년 - 「정치경제학 비판」 출간
1861-1863년 - 「잉여가치학설사」 집필
1864년 -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 창립 참여. 창립 선언문과 규약 작성
1867년 - 『자본론』 1권 출간
1871년 - 파리 코뮌에 대한 성명서 「프랑스 내전」 발표
1875년 - 「고타 강령 비판」 집필
1881년 - 아내 예니 사망
1883년 - 3월 14일 런던에서 사망 (향년 64세)
사후 출간
1885년 - 『자본론』 2권 (엥겔스 편집)
1894년 - 『자본론』 3권 (엥겔스 편집)
1927년 - 「헤겔 법철학 비판」
1932년 - 「경제학-철학 수고」, 「독일 이데올로기」
1939년 -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그룬트리세)」
1956-1962년 - 「잉여가치학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