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 사랑은 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가

사르트르, <존재와 무>

by 김경윤

1. "왜 그렇게 쳐다봐?" - 시선이 불러일으키는 불안

연인과 함께 있는 어느 평온한 순간, 문득 상대방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알 수 없는 불편함에 휩싸인 경험이 있나요? "왜 그렇게 쳐다봐?"라는 질문 속에는 단순한 어색함을 넘어, 나의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고 평가받는 듯한 미묘한 불안감이 숨어있습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에게 이 ‘시선(Le Regard, The Look)’은 단순한 눈 맞춤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세계를 침범하고, 나를 하나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강력한 힘을 가진 ‘사건’입니다. 이것은 바디우가 말한 낭만적인 ‘사건’과는 전혀 다른, 나의 주체성을 위협하는 실존적 위기 상황이죠.

사르트르는 그의 방대한 주저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에서, 사랑의 낭만적인 외피 아래 숨겨진 불안과 갈등의 맨얼굴을 냉철하게 해부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의 눈을 빌려,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 아래에서 우리가 왜 불안을 느끼는지, 그리고 사랑이라는 관계가 본질적으로 왜 위태로운 갈등일 수밖에 없는지를 탐색하며, 이 불안을 딛고 설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보고자 합니다.


2. 지옥, 그것은 타인이다: 사랑은 두 자유의 전쟁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Huis Clos)』에 나오는 “지옥, 그것은 타인이다(L'enfer, c'est les autres)”라는 유명한 명제는, 종종 인간혐오적인 말로 오해받지만, 실은 그의 타인론과 사랑론의 본질을 꿰뚫는 말입니다. 이는 타인이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 자체가 나의 ‘자유’를 위협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 즉 ‘대자 존재(pour-soi, for-itself)’는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무(無)’이며,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절대적인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입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그의 말처럼,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이다’라고 정해진 본질 없이 이 세상에 그냥 내던져졌고, 우리의 모든 행동을 통해 우리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나는 내 세계의 중심이자 유일한 ‘주체(Subject)’이며, 세상의 모든 사물(즉자 존재, en-soi, in-itself)은 나의 의미 부여를 통해 존재하는 ‘대상(Object)’입니다.


“내가 혼자 있는 한 나는 나의 존재에 대해 ‘책임’을 느끼지 못한다. 나는 나의 존재를 문제 삼지 않고 그냥 살아간다. (…) 그런데 갑자기 타인이 나타난다. (…) 타인은 나의 세계 한가운데에 하나의 구멍을 뚫어 놓고, 그 구멍을 통해 나의 세계 전체가 나에게서 빠져나가도록 한다.”

- 장 폴 사르트르, 『존재와 무』 중에서


그런데 갑자기 ‘너’라는 또 다른 주체가 내 세계에 나타납니다. ‘너’는 나를 ‘너’의 세계 안에 있는 수많은 대상 중 하나로 바라봅니다. 공원에서 혼자 책을 읽던 나의 평화로운 세계는,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순간 산산조각 나 버립니다. 나는 더 이상 내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그의 시선에 의해 판단되고 규정되는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키가 크네”, “옷을 못 입었네” 와 같이, 나는 그의 평가에 종속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르트르가 말하는 ‘수치심’과 ‘불안’의 근원입니다.


사랑은 바로 이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이지만, 사르트르에 따르면 이 시도는 필연적으로 두 가지 모순적인 실패에 봉착합니다.

내가 주체가 되려는 사랑 (사디즘적 경향): 나는 상대방의 자유를 빼앗고, 그를 나의 세계 안에 완벽히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대상’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너는 내 거야”라는 말은 바로 이 욕망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상대가 완전히 나의 소유물(대상)이 되는 순간, 나를 주체로 인정해 줄 그의 ‘자유’는 사라지므로, 내가 원했던 사랑의 인정은 불가능해집니다. 사랑은 실패합니다.

내가 대상이 되려는 사랑 (마조히즘적 경향): 반대로, 나는 상대방의 시선 아래 기꺼이 매력적인 ‘대상’이 되고자 합니다. 나의 자유를 포기하고 상대방의 세계에 완전히 흡수되기를 갈망하죠. “너 없으면 못 살아”라며 나의 모든 것을 상대에게 바치려 합니다. 하지만 나의 주체성과 자유를 포기하는 순간, 사랑을 할 ‘나’라는 주체가 사라지므로 이 역시 실패합니다.

사르트르의 비관적인 결론은 이렇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두 개의 자유가 서로를 대상화하기 위해 벌이는, 영원히 성공할 수 없는 투쟁이라는 것입니다.


3. ‘함께 있음’이라는 환상과 ‘실존적 고독’의 수용

그렇다면 사르트르의 세계에서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그는 비관론의 잿더미 속에서 역설적인 희망의 실마리를 남겨둡니다. 그 희망은 바로 ‘사랑이라는 프로젝트의 필연적 실패’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하나야”라는 낭만적인 말은 사르트르에게는 현실을 외면하는 ‘자기기만(Bad Faith)’일 뿐입니다. 우리는 결코 타인의 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타인 역시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자유와 그에 따르는 책임을 온전히 짊어진 채, 이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단독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 ‘실존적 고독’입니다.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욕망, 상대방과 완전히 하나가 되려는 환상을 포기할 때, 비로소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갈등은 존재들의 다수성에 대한 본래적 의미이다. (…) 갈등을 극복하려는 희망은 공허하다. 기껏해야 우리는 갈등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을 뿐이다. 즉, 내가 타인을 대상화하거나 타인이 나를 대상화하는 관계에서 벗어나, ‘우리-주체’로서 제3의 대상을 함께 바라보는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 장 폴 사르트르, 『존재와 무』 중에서


진정한 관계는, ‘너와 나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으며, 너는 영원히 나에게 미지의 타인’이라는 근본적인 분리의 사실을 받아들일 때 가능해집니다. 나의 고독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의 고독 또한 침해하지 않고 존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 단독자가 서로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함께 나아가는 것. 사르트르에게 이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긍정적 관계’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뜨거운 융합이 아니라, 서로의 거리를 존중하는 차가운 ‘연대’에 가깝습니다.


4. 불안을 넘어, 자유로운 자들의 연대로

사르트르의 이야기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당신이 느끼는 사랑의 불안은 어쩌면 상대방을 잃을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와의 관계 속에서 ‘나 자신’을, 나의 ‘자유’를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실존적인 외침일지 모릅니다.

상대방과 하나가 되려는 헛된 노력 대신, 나의 고독과 자유를 온전히 끌어안으십시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상대방의 고독과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존중하며 함께 걸어갈 때, 우리는 비로소 불안을 넘어선 성숙한 사랑의 문턱에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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