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오랫동안 함께한 노부부가 해 질 녘 벤치에 앉아 서로의 주름진 손을 잡고 있습니다. 그들의 침묵 속에는 수십 년의 세월이 담겨 있습니다. 처음 만나 설렜던 풋풋한 날, 사소한 오해로 밤새워 다투었던 날, 아이가 태어나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던 날, 소중한 이를 떠나보내며 함께 눈물 흘렸던 슬픈 날… 그들의 삶은 그 자체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한 편의 거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문득 깨닫습니다. “만약 우리가 저 모퉁이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우리만의 이야기도 없었겠구나.”
독일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전체주의라는 20세기의 거대한 폭력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의미를 치열하게 사유했습니다. 그녀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을,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성(Mortality)이 아니라, 세상에 태어나 언제든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 즉 ‘탄생성(Natality)’에서 찾았습니다.
아렌트에게 이 ‘탄생성’이 가장 빛을 발하는 순간이 바로 ‘사랑’을 통해 두 사람이 만나는 순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녀의 주저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을 길잡이 삼아, 사랑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이 유한한 세상에 우리만의 고유한 흔적을 남기고, 죽음을 넘어 영원히 기억될 수 있는지, 그 숭고한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의 긴 여정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적인 삶(vita activa)을 세 가지 근본 활동으로 구분합니다. 이는 사랑이 우리 삶에서 어떤 차원의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는 중요한 틀이 됩니다.
노동(Labor):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생물학적이고 순환적인 활동입니다. 먹고, 자고,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활동이죠. 사랑 없는 관계는 때로 이 ‘노동’의 수준에 머물기도 합니다. 그저 생존과 편의를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입니다.
작업(Work): 유용하고 오래 지속되는 사물(도구, 예술품, 건물 등)을 만드는 활동입니다. ‘작업’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흔적을 세상에 남기며 안정적인 세계를 구축합니다. 어떤 사랑은 이 ‘작업’과 같습니다. 함께 집을 짓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공동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합니다.
행위(Action)와 말(Speech): 이것이 아렌트 철학의 핵심이자, 사랑의 궁극적인 의미와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행위’란 타인들 앞에서 나 자신의 고유함(‘내가 누구인지’)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관계와 공동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활동입니다. 이 ‘행위’는 반드시 ‘말’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해석됨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갖습니다.
“행위와 말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고, 자신의 고유한 인격적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나타낸다. (…) 이러한 현시는 다른 사람들의 현존을 필요로 한다.”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중에서
아렌트의 관점에서 보면, 사랑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예측 불가능한 ‘행위’입니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을 드러내고(‘자기 계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우리’라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합니다. 이것은 그 어떤 노동이나 작업보다도 고유하고 창조적인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함께 겪는 모든 행위와 말들—첫 만남, 고백, 다툼, 화해, 약속, 기쁨, 슬픔—은 그물처럼 촘촘하게 엮여 하나의 ‘이야기(Story)’를 만들어냅니다. 이 이야기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오직 그 두 사람이 만났기에 탄생할 수 있었던 고유한 서사입니다.
아렌트에게 인간은 죽으면 사라지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그가 남긴 ‘행위’와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영원히 살아 숨 쉴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위대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남겨 불멸의 명성을 얻었듯이 말입니다. 아렌트는 이것을 ‘불멸성(Immortality)’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간 실존의 허약함에 대한 구제책은 행위 능력에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비록 죽어야만 하는 존재이지만, 불멸의 것을 남기고 자신을 기억할 만한 존재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인간의 행위는 비록 물질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인간관계와 기억의 실체 속에 살아남는다.”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중에서
우리의 육신은 언젠가 먼지처럼 사라집니다. 우리가 ‘작업’을 통해 만든 집도 언젠가는 허물어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위’를 통해 만들어낸 그 눈부시고 때로는 고통스러웠던 ‘이야기’는, 우리의 자녀들, 친구들, 그리고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살아남아 회자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위대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남겨 불멸의 명성을 얻었듯이, 우리 평범한 사람들도 사랑이라는 위대한 행위를 통해 우리만의 ‘불멸성(Immortality)’을 획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10주간의 긴 여정을 통해 그려온 ‘사랑의 좌표’의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플라톤처럼 아름다움에 끌려 사랑의 여정을 시작했고,
부버처럼 ‘너’를 온전히 마주하며 ‘우리’라는 관계의 문을 열었습니다.
프롬의 가르침에 따라 사랑을 능동적인 ‘기술’로 연마했고,
바르트와 함께 갈등이라는 드라마의 고통을 긍정했습니다.
니체처럼 서로의 고독을 존중하며 자유로운 개인으로 굳건히 섰고,
바디우처럼 권태를 넘어 사랑을 창조적으로 ‘재발명’했습니다.
사르트르와 함께 불안의 근원을 직시하고 실존적 고독을 끌어안았으며,
키르케고르의 방식으로 흔들리지 않는 ‘윤리적 결단’을 내렸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가장 완전한 ‘우정’을 나누고 세상을 향한 연대를 꿈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렌트와 함께, 이 모든 과정이 결국 ‘우리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창조함으로써 죽음의 유한성을 넘어서는 ‘불멸성’을 획득하는 숭고한 여정이었음을 확인합니다.
사랑은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장 깊은 고통과 절망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길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랑이야말로 이 유한하고 때로는 무의미해 보이는 세상에 ‘나’라는 존재의 유일무이한 흔적을 남기고, ‘우리’라는 불멸의 이야기를 쓸 수 있게 하는 거의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오직 ‘나’라는 1인칭 시점의 독백만을 읊조리다 사라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랑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너’라는 2인칭을 만나고, ‘우리’라는 복수형의 서사를 쓸 수 있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때로 비극일 수도 있고, 희극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작가로서, 온전히 살아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이제 강의실의 불을 끄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당신의 위대한 사랑의 이야기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기를, 그리고 영원히 계속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