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공부하는 그대에게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는 누구일까요? 십대의 청소년일까요? 이십대의 청년일까요? 대학생일까요, 아니면 직장인일까요? 그도 아니면 결혼하여 자식을 둔 부모님일까요? 무엇이든 관련이 없습니다. 그대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적어도 한 가지는 저와 공통된 관심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이라는 관심사가!
제가 처음에 ‘인문학’이란 이름을 달고 강의를 시작한 것이 2007년 여름이었습니다. 공부하고 강의하고 또 공부하고 강의하고……. 쉴 새 없이 달려왔어요. 그 동안 제 강의를 들었던 많은 분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분들의 웃음과 한숨이 마치 지금 제 옆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인문학 유행?
요즘은 인문학이 유행처럼 번져서 웬만한 강의에는 인문학이라는 이름이 단골메뉴처럼 붙어 있습니다. 역사인문학, 여성인문학, 청소년인문학……. 인문학이 다루는 영역이 방대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인문학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 여러 부류이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고전적 영역으로 보면 문사철(文史哲)이라 대변되는 문학, 역사, 철학이 모두 인문학에 속해 있고요. 대학의 인문학부를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문학, 역사, 철학뿐만 아니라, 언어학, 법학, 심리학, 종교학, 인류학, 사회학 등 무수히 많은 학과를 포괄하고 있어요.
인문학이 대학교내에서는 거의 비인기과목처럼 취급받으면서 힘겨운 대학 현실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데도, 일반 대중에게는 인기 있는 교양강좌로 널리 알려진 것은 아마도 최근에 작고한 스티븐 잡스가 애플사의 성공비결을 인문학과의 융합이라고 말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도 자신을 지금처럼 성장시킨 것은 마을의 도서관이었다고 말한 이후부터가 아닌가 싶네요.
그래서 사람들은 인문학을 마치 성공에 이르는 비결이나 되는 것처럼 환호했고, 거기에 대중적인 작가들과 강사들이 자신의 강의에 인문학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활동하면서 더욱 불이 붙었던 거지요. 『리딩으로 리드하라』, 『CEO의 서재』 등 성공하는 사람들의 성공담과 인문학과의 결합을 주된 전략으로 책이 나오며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었지요. 하지만 인문학이 반드시 성공과 직결되는 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할 것 같아요.
인문학이란
인문학의 어원은 후마니타스(humanitas)예요. ‘인간에 대한 학문’이란 말이지요. 자연현상이 아닌 인간현상을 주로 탐구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어요. 한편 스티븐 잡스가 말한 인문학은 리버럴 아트(liberal arts)로 표현되는데요. 이 리버럴 아트는 전문적, 직업적, 기술적 교육과는 다른 일반적 지식을, 이성적 사유와 지적 능력을 키우는 학문을 모두 포괄하고 있어요. 그렇게 본다면, 수학이나 자연과학도 인문학 영역에 모두 담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 속담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이처럼 인문학이 무수히 많은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면 모든 학문에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나는 학문의 영역으로 인문학을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목적으로 인문학에 접근해보려 해요.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아주 소박한 출발일지도 몰라요. 내가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명구는 소크라테스의 “그대의 영혼을 보살피라.”는 구절이에요. 이 말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이 쓴 『파이돈』에 나오는 말로써, 소크라테스가 친구에게 죽기 직전에 당부한 말이지요.
영혼(soul)이라는 말이 종교적인 냄새가 나서 마음에 거슬리나요? 그렇다면 정신(精神)이라고 말해도 괜찮아요. 동양에서는 인간의 몸을 심신(心身)으로 보고, 심적 구성요소를 정신(精神)으로 보았지요. 정(精)이 순수하고 맑은 기운이라면, 신(神)은 그보다 더욱 신령하고 신비스런 기운이에요. 물론 우리는 그러한 뜻을 염두에 두고 정신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지만요.
물신주의의 시대
오늘날 우리 사회를 표현할 수 있는 용어는 많지요. 소비사회(장 보드리야르), 포스트모던 사회(리오타르), 위험사회(울리히 벡) 등 다양한 사상가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의 특징을 포착하여 시대적인 특성을 파악하려고 했어요. 이러한 학문적 노력은 깊이 탐구되어야겠지만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가장 고전적인 표현을 저는 쓰려고 해요. 오늘날 우리사회는 ‘물신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다’라고요. 물신주의(物神主義)란, ‘인간이 상품이나 화폐 따위의 생산물을 숭배하는 현상’이라고 사전은 말해줘요. 값비싼 명품이 최고인 세상, 돈이 모든 것이 척도가 되는 세상이 바로 물신주의 세상이지요.
기독교식으로 표현하면, 하느님의 자리에 돈이 올라앉은 형국이지요. 이 돈이 지배하는 세상은 비단 현재뿐만이 아니에요. 엘리자베스 시대에 영국에서 활동했던 셰익스피어는 『아테네의 티몬(Timon of Athens)』에서 이 돈의 위력을 이렇게 표현했지요.
금? 귀중하고 반짝거리는 순금? 아니 신들이여!
헛되이 내가 그것을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네.
이만큼만 있으면, 검은 것을 희게, 추한 것을 아름답게 만든다네.
나쁜 것을 좋게, 늙은 것을 젊게, 비천한 것을 고귀하게 만든다네.
(……)
그렇다네, 이 황색의 노예는 풀기도 하고 매기도 하네,
성스러운 끈을.
저주받은 자에게 축복을 내리네.
문둥병을 사랑스러워 보이게 하고,
도둑을 영광스런 자리에 앉힌다네.
그리고 도둑에게 작위와 궤배와 권세를 부여한다네,
원로원 회의에서.
이것은 늙어빠진 과부에게 청혼자를 데리고 온다네.
양로원에서 상처로 인해 심하게 곪고 있는 그 과부가,
메스꺼움을 떨쳐버리고, 향수를 발라 젊어져
오월의 청춘이 되어 청혼한 남자에게 간다네.
오늘날은 아닌가요? 오늘날은 더더욱 기승을 부리지요. 돈이면 뭐든지 되는 세상, 결국 세상 성공의 척도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가로 결정되는 세상이잖아요.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도, 명문대학에 들어가려는 이유도, 성공을 하려는 이유도 모두 이 돈으로 귀결되는 거지요.
88만원 세대
그런데 문제는 이 성공과 부유의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현실이지요. IT산업에서 성공한 사람인 스티븐 잡스나 빌 게이츠,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되고 있는 안철수만 기억하고 있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IT산업에서 실패하고 좌절하고 몰락했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않잖아요. 제가 잘 아는 선배 역시 IT산업이 유행했던 시대에 성공의 기회를 잡으려고 뛰어들었다고 수차례 망하고 이제는 연락조차 끊어지고 말았지요. 밝음 뒤에 가려진 이 엄청난 그림자의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하고 위무하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본령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요즘 젊은 세대를 지칭하는 우울한 용어 중에 하나가 바로 ‘88만원 세대’에요. 우석훈과 박권일이 『88만원세대』라는 책을 쓰고 나서 알려진 이 용어는 우리 20대의 자화상을 잘 그려내고 있지요. 책에 서문에는 왜 88만 원 세대라고 불렀는지 장황하게 설명되어 있어요. 소개할게요.
“우리들의 20대에 어울릴 만한 이름은 무엇일까? 이미 마케팅을 중심으로 재편이 완료된 우리 사회는 그들을 다만 ‘덩어리’로 인식할 뿐이다. 2030, 2533 혹은 1326 등 숫자로 지칭되는 그들은 다만 나이에 따라 구별되는 덩어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기성세대는 20대를 이름도 없이 그저 소비만 하는 덩어리로 바라본다는 말인가? 바로 그렇다. 대한민국이라는 땅덩어리 안에서 지금의 20대들은 TV와 라디오가 시키는 대로 소비하는 꼭두각시이며, 그 마케팅의 주체가 이들에게 붙여준 이름은 단지 나이에 따라 무리를 나눠놓은 덩어리의 이름일 뿐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학도의용군들도 ‘군번 없는 용사’라는 버젓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승자 독식의 이 살벌한 초절정 경쟁 사회에서 일상을 전쟁 치르듯 살아가는 20대들에게는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다니!
적절한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는데, 그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사실 집필 과정에서 나와 공저자인 박권일 기자가 사용한 시간의 절반은 이 이름을 찾는데 소비되었다. 외국의 사례를 나름대로 뒤져보고, 국내 현황을 샅샅이 훑어보아도 뾰족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맨 처음 제안한 이름은 ‘승자 독식 세대’였다.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 박원일 기자가 ‘배틀 로열 세대’라는 이름을 제시하였다. 2008학년도 입시경쟁이 더 강화되면서 이제 막 고3이 된 89년생들이 자조적으로 붙인 이름이 배틀 로열 세대였다. 베틀 로열은 2002년 한국에서 개봉한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영화 <배틀 로얄>에서 따 온 이름이다. 이 이름을 89년생뿐 아니라 젊은 세대 전체로 확장하자는 게 박기자의 제안이었다. 로마 활제 앞에서 벌어졌던 검투사들의 무한 경쟁, 때로는 호랑이와 사자까지 동원되었던 그 게임에서 유래한 이 이름은 멋지기는 했다. 그러나 사회학자인 김정훈 박사는 이 이름이 너무 어렵고 추상적이라고 지적했다. ‘경쟁’과 ‘잔인함’은 인간 일반의 속성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현재적 문제라는 구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그 지적의 골자였다. 급기야 ‘막장세대’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20대에게 차마 이 이름을 쓸 수 없었다.
다시 구체적인 자료를 찾기 시작했을 때, 마침 눈에 들어온 것이 비정규직으로 대학원생을 모집하는 국회의 공고였다. 기껏 ‘월급 90만 원’을 제시하면서, “통계가 가능하고, 정책 마인드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구절이 눈에 밟혔다. 우리나라에서 통계 전문가들은 정말 귀하다. 게다가 통계 전문가가 정책 마인드까지 있다면 그야말로 최상급 전문가에 해당한다. 그런 대학원 졸업자가 매일 출근해서 8시간씩 일하고 한 달에 90만 원을 받는다? 이를 계기로 국책 연구원에서 일하는 박사 수료자들의 경우를 살펴보니까 대략 100만 원을 약간 넘게 받는 정도였다. 처음에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박사 12년차인 내가 시간강사로 받는 임금도 100만 원이 채 안 되는 액수였다. 그래서 나는 이 숫자를 가지고 젊은 세대를 다시 규정해보려고 시도를 했는데, 이탈리아의 ‘천 유로 세대’와 겹치는 것 같아 아주 산뜻한 기분은 아니었다. 천 유로는 우리 돈으로 약 120만 원 정도다.
우리나라 전체 비정규직의 평균 임금(월급)은 약 119만 원이다. 여기에 전체 임금과 20대의 임금 비율인 74%를 곱해서 숫자를 뽑아보니까, 우연의 결과지만 딱 88만원이 나왔다. 물론 이건 ‘세전(稅前)’ 임금이다. 실제 20대의 평균 임금은 정규직으로 취직에 성공한 경우 훨씬 높을 것이고, 여기에 대학생 등 아직 경제활동인구에 편입되지 않은 비율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800만 명 정도의 비정규직 인구를 감안하면 세금을 제하고 평균적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있는 임금은 대체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88만 원? ‘88 꿈나무’도 아니건만 아무튼 숫자는 그렇게 나왔다. 20대 비정규직 임금 평균이 별도로 집계되지 않는 현 상황에서 약간의 논란거리가 있기는 하겠지만, 우리는 상징적인 의미를 더해 지금 20대를 ‘88만 원 세대’로 부르기로 하였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에 이 무슨 뚱딴지같은 임금이란 말인가!”
돈의 진정한 주인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도(Vilfredo Pareto)는 19세기의 영국의 부와 소득의 유형을 연구하다가 “전체 인구의 20%가 전체 부의 80%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20/80법칙이라고 불렀어요. 요즘 뉴욕증권가에서 농성하고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대는 미국의 경제위기를 빠뜨리고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은 1%에 지나지 않고, 그들이 미국경제를 쥐락펴락하고 있다면서 “우리가 99%다”라고 외치고 있어요. 20/80의 파레트 법칙이 무색하게끔 1/99라고 말하네요. 그리고 이미 이 시위는 미국의 월가뿐 아니라 미국에서만 100여개의 도시에서, 그리고 세계 주요도시에서 동조시위가 벌어지고 있지요. 부의 양극화에 대한 분노는 이미 전세계적 현상이라 할 수 있어요.
모두가 돈을 숭배하지만, 정작 돈을 쥐고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은 1%도 안 되는 세상. 그런데도 수많은 국민들이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자식마저도 이 돈이 지배하는 경쟁으로 질주하게 하는 세상, 이런 세상이 물신주의 세상인 겁니다. 신약(新藥) 실험의 결과가 1%에게만 효과가 있고, 99%가 부작용으로 고통 받고 있다면, 그 신약은 폐기될 것입니다. 한 식당에서 음식을 먹은 손님 100명 중 10명이 식중독에 걸렸더라도 그 식당은 분명 문 닫을 위기에 놓일 것입니다. 그런데 돈으로 성공할 확률이 50%는커녕 파레토에 의하면 20%도 안 되고, 점령하라 시위대에 의하면 1%도 안 되는데 우리는 왜 이 욕망의 질주를 계속하고 있는 걸까요? 이성적 사유가 왜 돈의 문제에 있어서는 작용하지 않는 걸까요? 돈은 이성적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서 그런 걸까요? 아니에요. 우리가 돈을 혐오하더라도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세상, 우리 사회가 돈에 의해서 작동되는 세상이기 때문이겠지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마르크스는 그의 주저 『공산당 선언』에서 이러한 현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역사적으로 부르주아지는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
지배권을 얻은 부르주아지는 봉건적, 가부장제적인 그리고 목가적인 관계를 모두 파괴했다. 그들은 타고난 상전들에게 사람들을 묶어놓던 갖가지 색깔의 봉건적 끈들을 가차없이 끊어버렸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적나라한 이해관계, 무정한 ‘현금 지불’외에 다른 어떤 끈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들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경건한 광신, 기사의 열정, 속물적 애상의 성스러운 전율을 이기적 타산이라는 얼음같이 차가운 물속에 익사시켰다. 부르주아지는 개인의 존엄을 교환 가치로 용해시켰고, 문서로 확인되고 정당하게 획득된 수많은 자유들을 단 하나의 비양심적인 상업 자유로 대체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종교적, 정치적 환상들로 은폐된 착취를 공공연하고 파렴치하며 직접적이고 무미건조한 착취로 바꿔놓았다.
부르주아지는 이제까지 존경받으며 경외의 대상이었던 모든 직업에서 그 신성한 후광을 걷어내버렸다. 부르주아지는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 등을 자신들에게서 돈을 받는 임금 노동자로 바꿔놓았다.
부르주아지는 가족 관계 위에 드리워졌던 감동적이고 감상적인 베일을 찢고 그것을 순전한 금전 관계로 전환시켰다. "
마르크스는 “돈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은 돈을 숭배한다.”고 말한 적도 있어요. 돈이 신이 되는 세상이 바로 물신의 사회지요. 마르크스의 통찰에 따르면 이러한 돈의 질서 속에서 부르주아지(자본가들)도 자유로울 수 없지요. 그들 또한 돈이 만들어 놓은 관계에서 벗어나면 배척을 당할 테니까요. 인간이 돈을 만들었지만, 이제 돈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네요. 그런 의미에서 돈의 진정한 주인이 이제 어느 인간도 아니고 돈일 수밖에 없어요. 파레토가 말했던 20%의 부자들도, 월가를 장악하고 미국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1%의 금융자본가들도 결코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까요.
물신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돈을 신으로 섬기는 물신주의가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보장해준다면, 우리는 기꺼이 현대사회에서 돈을 섬기며 살아야겠지요. 그러나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우리 사회도, 세계 경제도 결코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이 물신주의를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또 다른 목표가 아닐까요?
나는 처음에 인문학의 출발점으로 “그대의 영혼을 보살피라”는 소크라테스의 말로부터 출발한다고 말했지요. 『소크라테스의 변론』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와요. 동료들에게 자신의 자식들을 부탁하며 당부하는 말이지요.
“저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를 부탁합니다. 여러분, 제 자식들이 장성하여 어른이 되거든, 제가 여러분을 괴롭힌 것과 같은 일로 저들을 괴롭혀서 복수해 주세요. 즉 저들이 덕(德)보다도 돈이나 그 밖의 다른 것에 먼저 머리를 쓴다고 생각되거든, 또 아무것도 아닌데 무엇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거든, 제가 여러분에게 한 것처럼 마음을 써야 할 일은 마음을 쓰지 않고, 아무 것도 아니면서 잘난 줄 알고 있다고 꾸짖어 주세요. 여러분이 그렇게 해주시면, 저 자신이나 제 자식들은 여러분에게 옳은 대접을 받는 것이 되겠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죽으면서까지 자식 걱정을 하고 있는 애틋한 장면이에요. 그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은 덕(德)보다는 돈에 더 신경을 썼나보죠. 사라져버릴 돈에 신경을 쓰지 말고 사라지지 않는 영혼에 신경쓰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버지 소크라테스의 간절함이 읽혀지기도 하네요.
일찍이 돈에 대해서 가장 민감하면서도 가장 경계를 많이 했던 민족이 바로 유태인입니다. 그들이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경전에 모세가 썼다는 다섯 가지 경전이 있는데요. 그 중에서 유대인들이 이집트의 포로로 끌려갔다가 모세의 지도로 탈출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출애굽기가 있어요. 그 출애굽기에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하느님으로부터 10개의 계명을 받고 내려오는 장면이 있는데요. 모세가 10계명을 받아서 내려오는데, 산 아래에서는 모세를 초조히 기다리던 유대인들이 온갖 금붙이와 보석을 모야 수송아지를 만들고 제자를 지내지요.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인데요. 일종의 맘몬신이지요. 이를 보고 분노한 모세는 십계명을 던져 이를 심판하고, 다시 십계명을 받아서 내려와요. 이 사건으로 보자면 유대인이 섬기는 하느님과 돈과 부를 상징하는 맘몬신은 양립할 수 없는 존재지요.
어쨌든 모세가 40일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하느님과 함께 지내며 새겼다는 이 10계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아요.
제1계명 :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제2계명 : 너희는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제3계명 : 너희는 너희 하나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제4계명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제5계명 :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제6계명 : 살인하지 못한다.
제7계명 : 간음하지 못한다.
제8계명 : 도둑질하지 못한다.
제9계명 :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한다.
제10계명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출애굽기 20장 1-17절)
지금 보면 너무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고리타분한 것 같기도 하고, 종교다원화시대에 시대착오적인 것 같기도 하지요. 하지만 위 계명의 만들어진 대전제를 아는 게 중요해요. 위 계명은 당시에 노예로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자유를 준 하느님이 지키라고 준 계명이잖아요. 그러니까 노예로 부림을 받고 살았던 사람이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지요. 저는 위 계명을 이렇게 해석해요. 탐욕과 교만의 금지! 위로는 어떤 것도 우상으로 섬기지 말고, 아래로는 그 누구의 것도 탐하지 말라는 명령! 다른 각도에서 말하자면 베풂과 겸손의 추구라고 할 수도 있지요.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다름 아닌 무한질주의 탐욕에 제동을 거는 것 아닐까요? 남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 더 많은 권력과 명예를 누리려고 하는 교만을 그치는 것 아닐까요? 저는 십계명을 종교적 계율로 해석하지 않고, 자유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덕목으로 삼고 싶어요. 그대는 어떤가요? ‘다른 신’이나 ‘우상’ 대신에 ‘돈’을 집어넣으면 더 뜻이 명료해지려나요?
다른 10계명
너무 종교적인 냄새가 나서 싫다면 다른 10계명을 하나 더 소개시켜 드릴게요. 거창고등학교에서 만든 ‘직업선택의 10계명’이에요. 보시지요.
1계명 :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계명 :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계명 :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계명 :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계명 :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을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을 가라.
6계명 :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계명 : 사회적인 존경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계명 :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계명 : 부모나 아내, 그리고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계명 :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어때요? 댁에 자녀가 있다면 이 학교에 보내고 싶으신가요? 남들이 싫어하는 길, 위험한 길, 잘 선택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라는 거창고등학교의 정신을 ‘청개구리 정신’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요즘 유행하는 ‘블루오션’의 길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장 존경하는 4대 성인이 걸었던 길이 이러한 길이 아니었던가요? 부인할 수 없을 거예요. 제가 인문학 강의를 하면서 가장 이율배반적으로 여겼던 현상은 4대 성인에 대해 강의를 할 때에는 모두 감동하시던 학부모님들이 자신의 자녀를 그들과 같은 길로 걷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질문에는 모두 고개를 숙이거나 딴청이 피웠다는 거예요. 참 난처한 상황이죠.
‘인문학=성공’을 바랐는데, 정작 ‘인문학↔성공’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의 그 황당함이란……. 저는 인문학을 공부하여 성공한 사람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인문학적 아이디어나 태도로 성공을 했다면, 그것은 참으로 대단하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지요. 그러나 인문학이 가르치는 것이 성공은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오히려 인문학은 세속적 성공과는 거리가 먼 학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입장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만약에 성공이 따른다면 그것은 인문학적 삶을 살면서 생기는 부차적인 효과겠지요. 인문학의 본령은 성공이 아니라 비판과 성찰입니다. 이 비판과 성찰이야말로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삶의 정신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것이 곧 ‘영혼을 보살피는 일’이 되는 거지요. 그렇게 영혼을 보살피다보면 돈이 주는 행복과는 전혀 다른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인문학 십계명
그래서 나는 우리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10개의 계명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인문학 십계명이란 이름도 붙였고요. 이 10개의 계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계명 : 정지하라
2계명 : 방황하라
3계명 : 의심하라
4계명 : 공부하라
5계명 : 음미하라
6계명 : 성찰하라
7계명 : 저항하라
8계명 : 변신하라
9계명 : 비상하라
10계명 : 사랑하라
각 계명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 계명에 적합한 사상가나 저술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뮬론 관련된 사상가나 저술들도 많이 소개할 예정이에요. 그밖에도 동화나 그림책, 시나 소설, 영화나 명화 등도 함께 감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저와 함께 이 여행을 떠나 보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