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중심으로
<원숭이 꽃신> 이야기를 아나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이 이야기는 동화작가 정희창의 작품 중 하나지요. 줄거리는 다음과 같아요.
원숭이가 사는 마을에 어느 날 오소리가 나타나지요. 오소리는 원숭이에게 예쁜 꽃신을 두어 차례 선물합니다. 신은 폭신폭신하고 따뜻했어요. 특히 원숭이는 돌밭을 달려도 발이 아프지 않고 걷는 게 즐거웠지요. 그런데 세월이 흐른 뒤 신발이 다 낡아 맨발로 다니자니 도저히 발이 아파 다닐 수 없었어요. 그래서 오소리를 찾아가 꽃신을 한 켤레 더 달라고 부탁해보지만, 오소리는 ‘더 이상 공짜는 없다’고 말해요. 그렇다고 원숭이가 스스로 꽃신을 만들지는 못해요. 그러자 오소리는 잣 다섯 개만 주면 꽃신을 준다 합니다. 원숭이는 잣과 꽃신을 바꾸었어요. 또 세월이 흐른 뒤 신발이 필요한 원숭이가 오소리를 찾으니 이제는 값이 올라 잣 열 개를 달라 해요. 그 다음에 오소리는 잣 스무 개를, 또 다음에는 백 개를 가져오라 하지요. 할 수 없이 원숭이는 더 오랜 시간 동안 잣을 모아 새 신을 얻었어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 겨울이 왔는데 또 신발이 필요했지요. 원숭이는 흐느끼며 오소리에게 호소했어요. 겨울이라 잣이 없다고 하면서요. 오소리가 말했지요. 우선 신발 네 켤레를 외상으로 줄 테니 나중에 가을이 오면 잣 오백 개를 따오라고요. 원숭이는 결국 잣 삼백 개를 따주고 나머지 이백 개에 대해선 집안 청소도 하고 개울을 건널 때 업어주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어요. 이제 원숭이는 자신의 미래 노동력을 저당 잡힌 상태에서만 꽃신을 신을 수 있게 되었죠. 결국 원숭이는 꽃신을 신는 대신 오소리의 노예가 되었답니다.
이 글을 읽는 아이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탓했을까요? 오소리의 부당이득을 비난했을까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마치 돈의 노예가 되어 평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같지 않나요?
노자와 장자의 지혜
중국 춘추시대를 살았던 노자(老子)라면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그가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함곡관의 문지기의 요청으로 만들었다는 『도덕경(道德經)』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훌륭하다는 사람 떠받들지 마십시오.
사람 사이에 다투는 일 없어질 것입니다.
귀중하다는 것 귀히 여기지 마십시오.
사람 사이에 훔치는 일 없어질 것입니다.
탐날 만한 것 보이지 마십시오.
사람의 마음 산란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훌륭한 사람[尙賢], 얻기 힘든 귀중한 것[難得之貨], 탐날 만한 것[可欲]을 원하는 것은 당연지사지요. 그런데 노자는 이 모든 것을 부정합니다. 아니 불(不) 자를 세 번이나 써가면서 말이지요. 이 도저한 부정의 정신이 바로 노자의 정신입니다. 모두가 지위나 귀함이나 부유를 추구할 때, 모두 그 방향으로 질주할 때, 그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고 브레이크를 밟는 지혜를 위대한 노인[老子]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시로 표현된 노자의 부정정신을 이야기로 표현한 것이 장자(莊子)입니다. 장자는 전국시대에 활동했던 사상가인데요.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저서 『장자(莊子)』 <천지편>에 나오는 노인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시지요.
자공(子貢)이 초(楚)나라를 유람하다가 진(晉)나라로 돌아갈 때 한수(漢水)의 남쪽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 한 노인들 만나니 그 노인은 바야흐로 밭이랑을 일구려고 굴을 파서 우물로 들어가 물동이를 안고 물을 퍼다 붓는다. 그런데 애써 힘들임이 심히 많으나 성과는 매우 적었다.
그래서 자공이 물었다.
“여기 기계가 있는데 하루에 백 이랑에 물을 댈 수 있습니다. 그러면 힘들임이 매우 적어도 효과는 큽니다. 당신은 그것을 바라지 않습니까?”
밭이랑을 일구던 노인이 자공을 쳐다보고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나무를 파서 기계를 만든 것인데 뒤쪽은 무겁고 앞쪽은 가벼워 물을 끌어당기는 것이 물 흐르듯 하고 빠르기가 넘치는 홍수 같습니다. 그 이름을 도르래라 합니다.”
그 밭이랑을 일구던 노인이 버럭 성을 내다가 곧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우리 선생님께 들으니 기계란 것이 있으면 반드시 꾀를 부리는 일이 있게 되고, 꾀를 부리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꾀를 내는 마음이 생기며, 꾀를 내는 마음이 가슴속에 있으면 곧 순백한 마음이 갖추어지지 않게 되고, 순백한 마음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신묘한 천성이 안정되지 않으며, 신묘한 천성이 안정되지 않으면 도(道)가 깃들지 않는다 하시었네. 내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네.”
자공이 뻘겋게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못했다.
문명론자인 자공의 유혹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거부하는 노인의 당당함에서 무엇이 느껴지나요? 편리를 위해서는 쓸모가 아직 있는 것도 쉽게 버리고 교체하는 우리의 습관이 부끄러워지지 않나요? 컴퓨터, TV, 휴대폰의 변천사와 더불어 변했던 우리의 욕망사가 그려지지 않나요? 웬델 베리라는 미국의 환경운동가가 <나는 왜 컴퓨터를 쓰지 않는가>라는 글로 환경 운동의 최전선 논쟁을 만든 적이 있어요. 웬델 베리는 말합니다. “컴퓨터의 사용이 새로운 생각이라면,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더욱 새로운 생각이다.” 컴퓨터의 첨병 스티븐 잡스와 컴퓨터의 거부자 웬델 베리 중 누가 더 인문학적인가요? 이에 대한 대답은 그대에게 남겨두기로 하겠습니다.
부정의 정신
동양의 부정정신이 노자와 장자를 통해 구현되었다면, 서양의 대표주자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인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부정 변증법(Negative Dialektik)』이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요. 그는 헤겔의 부정의 부정을 통해 긍정을 이끌어내는 변증법적 도식은 대립물의 차이를 외면하고 동일자로 통일시키려는 폭력적인 사고라고 생각하여 이를 반대합니다. 그것은 일반화를 통해 개별자의 고유한 특성을 제거하려는 태도라는 점에서 오히려 거부되어야할 관점이지요. 나와 그대가 다른데, 나와 그대의 공통점을 들어 하나로 묶으려고 하는 것은 나와 그대의 고유성을 상실하게 되는 위험을 늘 안고 있는 것이지요.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시키려는 ‘이성의 간계’는 그야말로 간계에 지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대신 아도르노는 차이의 차이로 인정하는 부정의 변증법을 주장합니다. 다름이 같음으로 환원되지 않고 다름으로 인정된다는 점에서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의 철학’을 선취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네요.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까요.
“세계가 형식을 상실했다는 탄식은, 주체가 암암리에 외부로부터 타율적으로 기대하는 구속력 있는 질서에 대한 호소의 서곡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주장이 단순한 이데올로기 이상의 것인 한, 그것은 주체 해방의 성과가 아니라 이 해방의 실패 결과다. 단지 주관적 이성에 따라 조형된 현존재 상태의 무형식적 요소로서 나타나는 것은 주체를 속박하는 것, 곧 순수한 대타존재 내지 상품적 성격의 원칙이다. 보편적 등가성과 비교가능성을 위해 이 원칙은 모든 곳에서 질적 규정을 격하하고 평준화하는 경향을 지닌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인간의 매개된 지배이기도 한 바로 그 상품적 성격이 주체들을 미성숙상태에 고착시킨다. 주체들의 성숙상태와 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자유는 별개의 것이다.”
힘든 철학적 용어가 넘쳐나지만, 일단은 무시하기로 하지요. “보편적 등가성과 비교가능성을 위해 이 원칙은 모든 곳에서 질적 규정을 격하하고 평준화하는 경향을 지닌다”는 표현에 딱 어울리는 대상을 상상해 보세요. ‘돈(화폐)’은 어때요? 돈은 모든 질적 차이를 제거하고 평준화하여 보편적 척도인 화페단위로 우리를 평가하잖아요. ‘민족’은 어떤가요? 민족구성원 개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제거하고 민족적 특성만을 특권화하여 평준화하는 개념 아닌가요? 그것을 아도르노는 ‘상품적 성격’이라고 말하네요.
아도르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상품적 성격으로 규정하는 한, 우리는 미성숙상태에 고착되고 만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성숙과 자유는 다른 차원에서 추구되어야 하는 거지요.
자본의 일방통로를 거부하라
그렇다면 우리는 굳이 돈(자본)이 만들어 놓은 일방통로를 선택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경쟁과 탐욕의 도로에서 벗어나 그와는 다른 길을 가보는 것은 어떨까요? 고속도로가 자동차만 다니는 특권화된 도로라면, 우리는 그 길이 아닌 자전거도로나 산보로를 선택할 수 있잖아요. 시인 유하는 <나는 추억보다 느리게 간다 :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2>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를 움직이는 연료는 침묵이요
나의 엔진은 바람이요
나의 경적은 휘파람이다
나는 아우토반의 욕망을 갖지 않았으므로
시간으로부터 자유롭다
하여 목적지로부터 자유롭다
나는 아무것도 목표하지 않는다
목표하지 않기에 보다 많은 길들을
에둘러 음미한다
나는 늘 도중(途中)에 있다
나는 샛길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길의 선지자이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의 중심이 아니라 인간의 아웃사이더이다
아웃사이더의 서정이다
숲으로 난 샛길을 사랑하는 산책가의 몸이다
그러므로 나는 추억보다 느리게 간다
나를 무수히 추월해간 지상의 탈 것들이여
어쩌면 목적지란 시간의 종말이 아닌가
나의 시간은 무한한 곡선,
은륜의 텅 빈 내부로 물이 고이듯 시간이 머문다
샛길의 시간은 무익하여, 아무도 가지려 하지 않는다
나는 그 무익한 시간들을 벗 삼아
유한한 삶에 대한 명상을 충분히 할 것이다
산책가는 늘 길 뒤편에 남아 있다
풀잎 하나 사소한 흔들림에도
생의 시간을 확장시키며
고속도로를 벗어나 샛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휘파람 불며 달리는 시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나요? 엔진의 힘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달리는 자전거. 시간의 종말인 목적지를 향해 직선으로 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확장인 도중(途中)에서 곡선으로 산책하는 시인. 유익이 아니라 무익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노자나 장자와 유사하고, 인간의 중심이 아니라 아웃사이더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아도르노의 정신을 이어받은 시인이 그려지지 않나요?
아하, 그러고 보니 ‘은륜의 텅 빈 내부로 물이 고이듯’이라는 표현은 노자의 수레바퀴와 그릇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노자의 『도덕경』 11장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서른 개 바퀴살이 한 군데로 모여 바퀴통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수레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그릇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방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있음이 쓸모있는 것은
없음이 쓸모가 생겨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때요, 자전거의 ‘은륜(銀輪 :은빛 바퀴살)’과 수레바퀴, ‘텅 빈 내부’와 텅 빈 ‘그릇’이 묘하게 일치하지 않나요? 게다가 ‘샛길의 시간은 무익’하다는 표현과 ‘없음의 쓸모’가 신기하게 공명되지 않나요? 이처럼 시공간을 초월하여 시인과 철학자는 만나 서로의 정을 나누는 거예요.
멈춰라
저는 인문학의 첫 번째 계명을 ‘정지하라’라고 말했어요. 무언가 변화하려면 우선적으로 기존의 사고나 삶의 방식을 멈춰야해요. 돌아서기 위해서라도, 방향 전환을 위해서라도 속도를 줄이고, 영점에 도달하는 순간이 있어야 다음 전환이 가능한 것이지요. 이러한 지혜를 노자를 익히 알고 있었어요. 지금부터 소개하는 글들을 잘 보세요.
명성과 내 몸, 어느 것이 더 귀합니까?
내 몸과 재산, 어느 것이 더 중합니까?
얻음과 잃음, 어느 것이 더 큰 괴롭습니까?
그러므로 지나치게 좋아하면 그만큼 낭비가 크고,
너무 많이 쌓아두면 그만큼 크게 잃게 됩니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아는 사람은 위태롭지 않습니다.
영원한 삶을 살게 됩니다.(『도덕경』 44장)
노자 『도덕경』 44장에 나오는 구절이에요. 삶에서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눈이 있어야겠지요. 명성, 재산보다 더욱 귀중한 것이 바로 내 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지나치면 반드시 위태롭게 되지요. 그래서 노자는 ‘멈춤[止]’을 우리에게 권고하는 거예요. “이제 멈춰라. 멈추면 영원한 삶이 보장되지만, 지나치면 위태롭게 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신 숭배의 질주는 멈춤이 없지요. 분명 잘못될 것을 알면서도 계속 도박장을 찾는 도박중독자처럼, 손가락이 잘려도 도박장을 기웃거리는 타자들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나요?
완전한 것은 모자란 듯합니다.
그러나 그 쓰임에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가득찬 것은 빈 듯합니다.
그러나 그 쓰임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참으로 곧은 것은 굽은 듯합니다.
참다운 솜씨는 서툴게 보입니다.
참다운 웅변은 어눌해 보입니다.(『도덕경』 45장 중)
사람들은 완벽한 것을 좋아합니다. 행복 또한 완벽한 행복이 좋겠지요. 그러나 그 완벽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요? 공부를 하면 얼마나 해야 잘 하는 걸까요? 돈을 벌면 얼마나 벌어야 만족해질까요? 지위는 얼마나 올라나 행복할까요? 끝이 없어요. 끝이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하지요. 노자는 말합니다. 조금은 모자란 듯, 조금은 빈 듯, 조금은 굽은 듯, 조금은 서툰 듯, 조금은 어눌한 듯, 그렇게 살라고요. 그것이 바로 현실에서 누릴 수 있는 완벽이라고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볼까요.
이 세상에 도가 있으면,
군사용 말의 똥으로도 거름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이 세상에 도가 없으면,
농사용 말도 전쟁에 끌려가 새끼를 낳게 됩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욕심은 없고
갖고자 하는 욕심보다 더 큰 허물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만족하십시오.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도덕경』 46장)
말은 말입니다. 그러나 평화 시에는 군마(軍馬)도 농마(農馬)가 되고, 전쟁 시에는 농마도 군마로 끌려갑니다. 마르크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요. “흑인은 흑인이다. 그는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노예가 된다.” 마르크스의 어법을 빌어 노자의 도(道)를 말해보면, “그대는 본래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욕심으로 만들어놓은 세계가 그대를 불만족한 노예로 만든다.” 부국강병을 향해 질주했던 춘추시대의 군주들의 길과 만족함을 알라는 노자의 길은 이처럼 다릅니다. 그대의 길은 어느 길에 가깝습니까?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이제 끝에 거의 다왔네요. 노자를 따라온 길이 즐거우셨습니까? 저는 노자의 길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어요. 찰리 채플린이 만든 <모던 타임즈(Modern Tims)>라는 영화예요. 이 영화에서 찰리는 두 개를 길을 걷게 되요. 첫 번째 길은 집단적인 흐름 속에서 기계처럼 살아가는 공장노동자의 길이고요, 두 번째 길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백화점 경비원으로, 철공소 노동자로, 술집의 웨이터로 전전하다가 결국 쫓겨나 여인과 떠나는 방랑자의 길이지요.
첫 번째 길에서 찰리는 컨베이어 벨트 공장에서 하루 종일 나사못 조이는 일을 하게 되지요. 단순 작업의 결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조여 버리는 강박 관념에 빠지고만 찰리는 정신이 이상해져서 급기야 정신 병원까지 가게 돼요. 찰리는 병원에서 퇴원한 후 일자리가 없어 거리를 방황하다가 시위 군중에 휩싸여 또 다시 감옥에 끌려가게 되지요. 노자가 말하는 군마(軍馬)의 고달픔이 절절히 느껴지는 대목이에요.
다음이 두 번째 길. 그러다가 몇 년의 감옥살이 끝에 풀려난 찰리는 빵을 훔치는 예쁜 소녀를 도와주게 돼요. 그녀와 사랑에 빠져 그녀와 더불어 살 근사한 집을 사기 위해 백화점 경비원으로 취직하기도 하고, 철공소에서도 일을 하지만 번번이 소동을 일으켜 결국은 쫓겨나게 되지요. 하지만 소녀의 도움으로 카페에서 일하게 된 찰리는 자신을 추적하는 사람들에 아랑곳 않고 노래를 하다가 결국 다시 떠돌이가 돼요. 그렇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에요.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방랑의 길을 걷게 되니까요. 이 영화에서 주목할 점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 전의 찰리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난 후의 찰리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거예요.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 노동자의 삶이 정신병으로 귀결되었다면, 그녀를 만나고 나서는 어디에서든 찰리는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요. 이 영화의 가장 명장면들이 바로 백화점에서 롤러스케이트를 타면서 춤추는 장면,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인데요. 못 보셨다면 나중에 한 번 꼭 보세요.
이 영화에서 찰리의 삶의 변곡점을 이루는 지점은 두 번째 길을 걷는 찰리가 매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거예요. 이전의 괴로웠던 삶이 중단되고, 힘겹지만 즐거운 삶이 시작되지요. 삶이 변화된 것은 아니에요. 매번 힘들지요. 하지만 삶의 태도가 변화된 거예요. 빈 듯, 모자란 듯, 굽은 듯, 서툰 듯, 어눌한 듯 살아가지만 늘 행복하지요. 이제 찰리와 사랑하는 여인이 걸었던 방랑의 길을 따라 우리도 한 번 가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