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느림』을 중심으로
모든 일을 게을리 하세.
사랑하고, 한 잔 하는 일만 빼고.
- 폴 라파르그
이번에 다룰 주제는 속도 또는 시간이에요. 느림과 빠름, 직선과 곡선, 기억과 망각 등을 이야기할 거예요. 물론 이 주제는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자, 그럼 천천히 가볼까요? 느림과 빠름 하면 뭐가 떠오르나요? 아이들에게 물었더니 이솝우화 ‘토끼와 거북이’를 이야기하네요.
우화의 내용은 너무도 잘 아니까 소개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빠른 토끼와 느린 거북이의 경주를 속도의 차원에서 보자면, 그것은 처음부터 부당한 경주예요. 선천적 능력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기회의 평등만 주어지면 정당하다는 논리와 비슷하네요. 그래서 이솝은 거기에 돌발 변수, 어찌 보면 습관 또는 태도의 변수를 넣었어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오만한 토끼와 우직하고 성실한 거북이를 경쟁시킨 거지요. 그래서 간신히 거북이가 이기는 이야기로 마무리되었지요. 하지만 차라리 경쟁을 시키려면 기회의 평등만 부여하지 말고, 조건의 평등도 고려해야겠지요. 예를 들면 토끼는 들판에서 달리고, 거북이는 물속에서 헤엄치는 경주는 어때요? 해볼 만하지요. 여러분은 느림과 빠름에 대해서 무슨 얘기를 할 수 있나요.
밀란 쿤데라의 느림
이번에 소개하고픈 작품은 밀란 쿤데라의 『느림(La Lenteur)』이에요. 체코에서 태어났으나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밀란 쿤데라는 아라공이 "금세기 최대의 소설가들 중 한 사람으로 소설이 빵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증명해주는 소설가"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지요. 그에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지만, 『느림』도 그에 못지않은 명작이지요.
이 소설은 호텔로 변해버린 성에서 벌어진 하루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분량은 얼마 되지 않지만, 복합적 플롯과 과거와 현재의 사건이 교차되는 구성, 개인적 사랑에서 집단적 정치, 철학과 신학, 문명비판적 요소들을 기막히게 직조되어 있는 이 작품은 작품의 제목처럼 느리게 읽어야 제 맛인 소설이지요. 그중 한 구절 ;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 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그 옛날의 한량들은? 민요들 속에 그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앗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들은? 시골길, 초원, 숲 속의 빈터, 자연과 더불어 사라져 버렸는가? 한 체코 격언은 그들의 그 고요한 한가로움을 하나의 은유로써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그들은 신의 창(窓)들을 관조하고 있다고, 신의 창들은 관조하는 자는 따분하지 않다, 그들은 행복하다. 우리 세계에서, 이 한가로움은 빈둥거림으로 변질되었는데, 이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빈둥거리는 자는, 낙심한 자요, 따분해하며, 자기에게 결여된 움직임을 끊임없이 찾고 있는 사람이다.”
천천히 명상하듯 읽어보세요. 소설이라기보다는 철학적 에세이에 가까운 그의 스타일을 맛보실 수 있을 거예요. 느림과 관조, 행복의 연관성, 그리고 한가로움과 빈둥거림의 대조가 멋지지요. 이 대목은 소설 속 화자(밀란쿠)가 시골 성(호텔)으로 가는 도중에 그의 차를 추월하려고 조바심을 부리는 뒤의 자동차의 모습을 보며 생각하는 대목의 일부분이에요. 그의 생각은 속도에 대한 명상이라 할만하지요. 좀 더 읽어볼까요.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ecstasy)의 형태이다. 오토바이 운전자와는 달리, 뛰어가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육체 속에 있으며, 뛰면서 생기는 미묘한 신체적 변화와 가쁜 호흡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뛰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체중, 자신의 나이를 느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자신과 자기 인생의 시간을 의식한다. 인간이 기계에 속도의 능력을 위임하고 나자 모든 게 변한다. 이때부터, 그의 고유한 육체는 관심밖에 있게 되고 그는 비신체적 속도, 비물질적 속도, 순수한 속도, 속도 그 자체, 속도 엑스터시에 몰입한다.
여기에서는 질주하는 오토바이 운전자와 뛰어가는 사람이 대조를 이루며 속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것은 인간의 속도와 기계의 속도의 차이이면서, 기술 혁명이 변화시키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물론 밀란 쿤데라가 따뜻한 시선을 보이는 쪽은 인간의 속도지요. 자신과 자기 인생의 시간을 의식하는 속도, 그래서 그 신체적 한계를 알고 있으면서 그 한계를 즐길 줄 아는 인간의 속도 말입니다.
빠빠라기의 시간
속도에 대한 명상은 소설에서만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빠빠라기』라는 책은 처음으로 문명을 본 남태평양 티아베아 섬마을 추장 투이아비의 연설집인데, 여기서 투이아비는 유럽 문명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제목에 나오는 ‘빠빠라기(Papalagi)’라는 명칭은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이 백인들을 가리켜 부르는 말이지요. 문명에 오염된 적이 없는 추장 투이아비는 처음으로 빠빠라기의 나라, 즉 유럽 문명을 여행하게 되었어요. 그가 본 것은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는 유럽이 아니라,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어리석은 백인들 사회였어요. 이 책은 60년대, 70년대의 학생운동가와 히피, 생태주의자, 그리고 현대문명의 대안 그룹의 필독서로 사랑을 받았지요. 그의 연설 중에서 시간과 관련된 부분을 읽어볼까요.
“빠빠라기는 시간이란 젖은 손으로 쥐고 있는 뱀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단히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미끄러져 빠져나가 버린다. 정작 자기 자신이 시간을 내몰고 있다. 빠빠라기는 언제나 손을 뻗어 시간을 붙잡으려 뒤쫓아 간다. 시간에게 양지에서 햇볕 쬘 틈조차도 주지 않는다. 시간은 언제라도 빠빠라기에게 달라붙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간을 의인화한 추장의 시선이 신선하지요. 쉬어야 할 것이 인간만이 아니에요. 시간에게도 양지에서 햇볕 쬘 틈을 주어야 한다는 추장의 이야기에 동의하실 수 있나요? 추장은 말합니다.
“우리는 저 불쌍하고 정신이 혼란스러운 빠빠라기들이 광란에서 벗어나 시간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그들이 갖고 있는 작고 둥근 시간 기계를 깨부수고, 인간이 필요로 하는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하루 24시간, 1,440분, 86,400초. 이렇게 시간을 쪼개고 쪼개 손목에 차고 늘상 확인하고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 아닌가요? 시(時)테그, 분(分)테그를 넘어 초(初)테그를 주장하는 책까지 나올 정도면, 우리가 지혜롭다고 해야 할까요, 어리석다고 해야 할까요? 추장은 그 둥근 시간 기계(시계)를 깨부수라고 충고합니다. 그리고 생의 진실을 말합니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인간에게는 주어져 있다고. 문제는 그 많은 시간을 삶의 풍요를 위해 사용하지 않는 문명인의 모습이겠지요.
시간의 불평등성
문제는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산업화와 기계화로 인해, 훨씬 적은 시간을 들여 과거보다 더 많은 상품을 만들 수 있었음에도 그에 따른 혜택이 인간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인간의 빈곤으로 귀결됩니다. 버트란트 러셀은 그의 책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이렇게 고발하지요.
“과학기술이 진보하고, 지금은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폭 감소시켜주고 있어서, 적게 일하고도 안락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증대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불필요한 것을 잔뜩 생산하게 하고, 일부 노동자들을 과도하게 일하게 함으로써, 결국 다시 실업자를 만들어 낸다. 기계를 도입해도 노동 시간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인원을 삭감하여 남은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높인다. 그런데 노동의 존엄이라는 신화가 유지되기 어려울 때는 어떻게 할까? 그때는 전쟁을 한다.”
그러니까 결국은 시간의 기계적 이용이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기계를 발명하게 되지만, 그 기계가 역설적으로 인간을 실업자로 만들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거지요. 그 모순이 극대화되면,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는 비극적 진술이 거짓이 아니었음은 인간의 역사에서 수없이 발견할 수 있어요.
시간을 근대사회와 연결하고 그 특성을 탐색한 사람 중 제이 그리피스가 있어요. 생태주의자이며 환경론자인 제이 그리피스는 『시계 밖의 시간』이란 책에서 근대적 시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오늘날의 시간 계산법은 시간을 더욱더 정확하게 묘사한다고 자부하지만, 사실 이것이 그려내고 있는 것은 근대성, 그 근대성의 자화상이다. 근대성은 시간에게 가혹하고 지나치게 직선적이며 비인간적이고 강압적인 특성을 부여하면서 사람들을 그 제물로 삼게 한다. 당신은 질주하는 시간의 새된 비명을 듣지만 - 마치 그것이 시간의 잘못인 양 - 일정한 틀 속에 시간을 짓이겨 넣고 시간의 측정에서 압도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근대 사회이다."
제이 그리피스의 통찰에 의하면 시간을 지배하고 그것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바로 근대사회의 특징이에요. 근대사회는 시간을 기준으로 빠른 계급과 느린 계급으로 양분됩니다. 마르크스라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고 표현했을 계급의 명칭이 시간적 별칭으로 바뀌었네요. 그리고 사회는 빠른 사회에게 유리하게 작동되지요. 밀란 쿤데라의 느림에 대한 명상은 제이 그리피스에 와서 더 구체적인 현대사회 분석의 도구로 사용되네요. 조금 길지만 인용해볼게요.
경쟁의 세계에서 속도는 사회적 신분의 지표가 된다. 빠른우편 도장이 찍힌 편지는 이제 '느림보'라는 조소를 받는 일반우편보다 더 존중되며, 가난한 사람들은 더 천천히 움직인다. 이들은 기다림이라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권력자나 부자들을 위한 초고속 철도와 비행기 최고 속도의 자동차들에 의해 추월당한다.
속도는 고도로 정치적이다. 어떤 사람의 속도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지불되기 때문에. 그래서 자동차 중심의 교통 시스템은 자동차에 의해 보행자와 자전거 탄 사람의 가던 길이 차단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계속도를 넘어서면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시간을 빼앗지 않고는 시간을 절약할 수 없다"라고 일리치는 말한다. 영국에서 도로 건설은 자동차 운행자의 시간 가치에 의해 정당화되어 왔다. 즉 자동차 운행자의 시간은 시간당 3만 원의 가치로 환산되면서도, 자동차 도로들이 파괴하는 풍경의 시간에는 그와 같은 가치가 부여되지 않는다. 운전자가 속도와 편안함 같은 혜택을 누리는 대가는 여타 보행자들에 의해 두려움과 신체적 부상과 공기오염과 교통혼잡과 같은 형태로 지불되고 있다.
정서적으로 볼 때는 질주하는 운전자가 속도의 쾌감을 맛보는 동안 보행자들은 불안과 무력감 등의 장애를 겪는다. 이와 매우 유사한 것이 서구화된 경제구조라 할 수 있다. 금융을 주도하는 자들이 그 시스템의 혜택을 누리는 동안, 그 지배력에의 접근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무산자들은 고용 불안과 빈곤에 시달린다. 제3세계 외채 문제의 전문가 수전 조지는 금융자본이 얼마나 빨리 이동하는지(하루에 10억 달러 이상이 이동한다)를 보여주면서, 세계는 '빠른 계급'과 '느린 계급'으로 양분되어 있고 빠른 계급은 혜택을 누리지만 느린 계급은 채무의 늪에 빠진다고 주장한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
속도의 정치적 분석이라 할만한 위의 글은, 보행자가 아닌 자동차 중심의 교통시스템, 무산자가 아닌 금융자본가 중심으로 작동하는 세계경제를 고발합니다. 어떻게 세상은 이렇게 변한 걸까요? 빠름의 가치만이 숭배되는 현대사회에서 느림을 이야기하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시대착오적인 것일까요? 느림의 가치를 복원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폴 라파르그의 저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는 그 방법에 대한 통찰로 이어집니다. 『자본론』으로 유명한 마르크스의 사위이면서 당대의 젊은 공산주의자로 활동한 라파르그는 3시간만 일하자는 혁명적 제안을 합니다.
“프롤레타리아들은 자연의 본능으로 돌아가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들은 매우 형이상학적인 법률가들이 꾸며낸 부르주아 혁명기의 인권 선언보다 천 배는 더 고귀하고 신성한 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선언해야만 한다. 하루에 세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낮과 밤 시간은 한가로움과 축제를 위해 남겨 두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주 5일제를 실시하는 요즘의 시선으로 봐도 과격하기에 충분한 이러한 주장은 너무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의 가치가 ‘노동의 가치’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일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상식에 해당하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죽기 살기로 일하는 걸까요? 노동의 현장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구호, “일하는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구호는 노동의 가치만을 숭상하는 현대인의 문제를 투영한 불구의 문장은 아닐까요? ‘일할 권리’가 아니라 ‘일하지 않을 권리’,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외치는 라파르그의 선언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삶의 진실을 상기시키는 것 아닐까요?
라파르그의 선언이 실현 불가능 것은 아닙니다.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이 같이 쓴 『조화로운 삶』에서 니어링 부부는 그러한 삶이 가능함으로 온몸으로 온 생애로 증명합니다. 노동 4시간, 지적활동 4시간, 친교활동 4시간으로 꾸릴 수 있는 ‘조화로운 삶(good life)’을 그들은 살았지요.
'돈을 번다'거나 '부자가 된다'는 생각은 사람들에게 매우 그릇된 경제관을 심어 주었다. 우리가 경제 활동을 하는 목적은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라 먹고살기 위한 것이다. 돈을 먹고살 수는 없으며, 돈을 입을 수도 없고, 돈을 덮고 잘 수도 없다. 돈은 어디까지나 교환 수단일 뿐이다. 식의주(食衣住)에 필요한 물건을 얻는 매개체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이지 그것과 맞바꿀 수 있는 돈이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필요한 현금에 맞추어 돈을 벌려고 했다. 필요한 것이 마련되었다고 판단되면, 그 해의 남은 시간 동안에는 더 이상 농사를 짓지도 않았고 돈을 더 벌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먹고사는 것만 해결하고자 했으며, 이렇게 일단 기본 생활 수단이 마련되면 다른 일들에 관심을 돌려 열중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진 것은 사회 활동, 그리고 독서와 글쓰기와 작곡 같은 취미 생활이었다.
(……)
우리는 어느 순간이나, 어느 날이나, 어느 달이나, 어느 해나 잘 쓰고 잘 보냈다. 우리가 할 일을 했고, 그 일을 즐겼다. 충분한 자유시간을 가졌으며, 그 시간을 누리고 즐겼다. 먹고살기 위한 노동을 할 때는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결코 죽기 살기로 일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더 많이 일했다고 기뻐하지도 않았다.
기억과 망각
다시 밀란 쿤데라의 『느림』으로 돌아가 볼까요. 쿤데라의 통찰에 따르면, 느림은 기억과, 빠름은 망각과 깊은 연관이 있어요. 그렇다면 빠름만을 숭상하는 현대는 망각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셈이지요. 그것을 쿤데라는 ‘속도의 악마’라고 불렀어요.
일정한 지속에 형태를 아로새기는 것, 그것은 아름다움이 요구하는 것일 뿐 아니라 기억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형태 없는 것은 파악할 수도 없고, 기억할 수 없는 까닭이다. 느림과 기억 사이, 빠름과 망각 사이에는 어떤 내밀한 관계가 있다. 지극히 평범한 상황 하나를 상기해 보자. 거리를 걸어가던 웬 사내가 문득, 뭔가를 회상하고자 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발걸음을 늦춘다. 반면 자신이 방금 겪은 어떤 끔찍한 일을 잊어버리고자 하는 자는, 시간상 아직도 자기와 너무나 가까운, 자신의 현재 위치로부터 어서 빨리 멀어지고 싶다는 듯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 한다.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정도에 정비례한다. 즉 속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느림은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한다. 우리 시대는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고 있으며 그래서 너무 쉽게 자신을 망각한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우리 시대는 망각의 욕망에 사로 잡혀 있으며 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속도의 악마의 탐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질주를 멈추고 속도를 줄어야 하지요. 고속버스 위에서 보는 풍광과 걸으면서 보는 풍광이 다른 이유는 바로 속도 때문이지요. 공원을 돌더라도, 건강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걷는 사람과 그저 어슬렁어슬렁 산보하는 사람이 보는 풍광은 분명 다르겠지요. 삶도 그런 것 아닐까요? 질주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기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을 잃고 살아가는 것 아닐까요? 입시전쟁에 내몰리는 아이들, 경쟁과 승리만이 미덕인 사회, 1등을 추구하고 거기에만 가치를 두는 삶, 그 망각의 삶 속에서 우리는 헤매고 있는 것 아닐까요?
기억하는 삶, 아이들에게 아이에게 걸맞은 추억을 안겨주는 삶, 청년에게 삶의 환희를 선사하는 삶, 어른들에게 인생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삶은, 빠름의 삶이 아니라 느림의 삶임을, 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어슬렁거리는 것임을, 한 방향으로 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방황하는 것임을 시간의 지혜는 알려주고 싶은 것 아닐까요?
또 다른 시간을 살기
한국계 일본인으로 환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쓰지 신이치(한국명 이규)는 슬로 라이프(slow life)라는 말을 처음으로 세상의 퍼뜨린 인물이기도 한데요. 그는 나무늘보에 매료되어 ‘나무늘보 친구들’이라는 NGO를 만들어 활동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단순히 동물 애호 차원이 아니라 나무늘보의 모습을 인간의 대안적 모습이라고 생각하여, ‘느림의 철학’을 만들어냈지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슬로 라이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어요.
우리가 사는 사회는 지금 경쟁주의나 생산성주의, 우생 사상 등에 크게 경도된 듯이 보인다. ‘빈둥거림주의’란 바로 이런 치우침에 대한 일종의 경종이다. 그러나 게으름 피우기를 장려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쟁의 바깥에 있는 참된 자신의 ‘거처’를 발견하는 일이다. 즉, 생산성의 가치로부터 벗어나 있는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는 일인 것이다.
흔히 현대의 젊은이들이 목표를 상실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회가 그들에게 목표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 젊은이들이 경쟁주의, 생산성주의, 물질주의, 배금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부모 세대나 또 그 부모의 부모 세대가 추구해 온 ‘신화’에 그들이 이제 넌덜머리를 내고 있다면, 그것은 꽤 믿음직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들에게 진정한 위기란 낡은 신화의 바깥에 있는 진정한 자신의 거처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가 아닐까. (……)
언제부터 우리들은 이토록 서두르며 곁눈도 주지 않은 채, 쫓기듯 길을 가게 된 것일까. ‘한눈파는’ 일도, ‘딴청 피울’ 새도 없이 말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빈둥대기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닐까. 지금이야말로 ‘빈둥거리기’를 회복해야 할 때가 아닐까.
경쟁 바깥에 있는 자신의 ‘거처’를 발견하라는 그의 제안이 어떤가요? 부모 세대의 ‘성장과 경쟁’ 신화에 염증을 느끼고 낡은 신화 바깥에서 자신의 삶을 모색하는 젊은이에게 박수를 보낼 수 있을까요? 아직까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경쟁과 성공의 신화가 지배하고 있지요. 그러니
까 빠른 속도를 숭배하고 있다고 해도 되겠네요. 그러나 그 숭배의 손길이 하나하나 거두어지고 있는 것도 현실이지요.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는 걸까요?
그동안 걸어왔던 길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이 인문학이 정신일 터. 그 길은 탄탄대로가 아닐 것이 분명하고, 한 방향을 향해 곧게 뻗는 길도 아니겠지요. 인문의 길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과 닮은 길이고, 평지가 아니라 굴곡이 심한 길이기도 하겠지요. 그 길을 어슬렁거리며, 방황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며, 탐색하고 탐문하고 경험하는 일, 그 일이 인문학의 운명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나와 함께 그 길을 가보시겠습니까? 망설이는 그대를 위해, 나는 뽈 엘뤼아르의 시 <커브>로 당신을 유혹해 봅니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