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십계명 3 : 의심하라

『금강경(金剛經)』을 중심으로

by 김경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그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요한복음』 2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가 죽은 후 부활을 하고 제자들 앞에 나타났는데, 다른 제자들은 예수임을 믿었으나, 도마는 의심을 했지요. 그러자 예수는 자신을 직접 만져보고 진짜임을 확인하라고 한 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하네요. 의심이 여기서는 미덕(美德)이 아니라 악덕(惡德)으로 취급받아요.


데카르트의 의심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에서는 의심은 미숙함의 표지이지만, 철학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이 의심이야말로 가장 필요한 덕목이 되지요. 거칠게 말하자면, 기존의 것을 의심하지 않는 자는 철학자가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 있어요. 고대의 소크라테스로부터 근대의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철학의 출발은 의심이었지요.


의심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철학의 확실한 기초를 세우기 위해서 우선은 모든 것을 회의해보기로 했어요. 보통 감각에 대한 회의, 꿈의 가설에 의한 회의, 악마의 가설에 의한 회의로 나누는데요.

우리 속담에 “솥뚜껑을 보고 놀란 가슴 자라 보고도 놀란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이처럼 감각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그는 보았지요. “감각은 종종 우리를 속인다는 것을 이제 경험하고 있으며, 한 번이라도 우리를 속인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편이 현명한 일이다.”라고 그는 말해요.

뿐만 아니라 외부 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의심까지 해요. 그것이 사실은 꿈일지도 모르니까요? “우리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치자. 그래서 눈을 뜨고 있다는 것, 머리

를 움직여 본다는 것, 두 손을 뻗어 본다는 것과 같은 개별적인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자.”

기계를 지배하는 세계에 저항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있어요. 거기에서는 컴퓨터-기계가 인간을 캡슐에 가둔 채 배터리처럼 사용하지요. 인간의 의식을 조종함으로써 거기에 반응하는 인간의 에너지를 활용하는 거예요. 물론 이러한 현실을 파악한 인간들이 기계가 만들어놓은 가상세계에 들어가 저항운동을 벌이지요. 키에누 리브스가 주연을 한 영화 『메트릭스』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살아가는 주인공 네오에게 저항군 모피어스가 나타나 이렇게 말해요.

빨간 약 파란 약.png

“파란 약을 선택하면 지금까지 이야기는 다 잊게 되지. 침대에서 깨어나고 네가 믿고 싶은 걸 믿게 돼. 빨간 약을 선택하면 자네는 이상한 나라에 남게 되고, 토끼 굴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게 되지. 잊지 말게. 난 진실만을 보여 준다는 것을.”


그동안 네오가 진짜라고 생각했던 세상은 결국 컴퓨터-기계가 만들어낸 가상의 세상이며, 진짜 세상은 그 너머에 비참한 현실로 남아있음을 깨닫게 해 주지요. 이처럼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이 진짜라고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뿐만 아니라 데카르트는 수학적인 명제마저도 거짓일 수 있다고 의심해요. 2+3=5라는 명제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필연적인 명제잖아요? 그렇지만 데카르트는 흔히 ‘악마의 가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정을 합니다. “유능하고 교활한 악마가 온 힘을 다해 나를 속이려 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래서 2+3이 5가 아닌데도, 계속 5라고 속일 수 있다는 거지요. 감각적, 이성적 토대가 다 무너지게 되는 이러한 회의는 그러나 회의로 끝나지 않아요. 그가 도달하고픈 결론은 그래서 자명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불가지론이 아니라, 그럼에도 도달할 수 있는 확실한 토대가 있다는 거지요.


“누군지 모르지만 아주 유능하고 교활한 기만자가 집요하게 나를 항상 속이고 있다고 치자. 자 이제, 그가 나를 속인다면, 내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가 온 힘을 다해 나를 속인다고 치자. 그러나 나는 내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는 결코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끔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이 모든 것을 세심히 고찰해 본 결과,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ego sum, ego existo)는 명제는 내가 이것을 발언할 때마다 혹은 마음속에 품을 때마다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내가 모든 것을 의심해도, 비록 악마가 나를 계속해서 속일지라도, 내가 존재한다,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은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 거지요. 한 세기 후, 빅토르 쿠쟁(Victor Cousin)이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데카르트의 사상을 재미있게 표현했어요. “Dubito, ergo Cogito, ergo sum. (나는 의심한다, 고로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불교의 의심


데카르트는 치열한 회의를 거쳐 의심할 수 없는 하나의 사실,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도달해요. 과연 거기가 회의의 끝일까요? 20세기의 철학자 자크 라캉은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라고 데카르트의 자명성을 의심하네요. 존재의 확실성이 아니라 존재의 불확실성을, 의식의 자명성이 아니라 의식의 불투명성을 이야기했지요.


서양의 철학자들도 의심의 대가이지만, 의심의 최고봉은 부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삶의 고통을 신에 의존하여 해결하려 했던 인도의 베다전통을 의심하고, 신(브라흐만:brahman)과 자아(아트만:atman)의 일치를 통해 구원에 도달하고자 했던 힌두교의 전통도 의심했어요. 진정한 행복은 쾌락에 있는 것도 아니고, 쾌락의 거부인 금욕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고요. 당대의 수행자들이 요가를 통해 자아를 발견하는 태도도 의심했지요. 그렇게 어렵게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몇몇 뛰어난 자들만의 특권이라 생각하고 그와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부처는 당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했던 자아의 추구가 아니라,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자아의 부정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였어요. 자아의 부정, 즉 아나트만(anatman)은 불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 짓게 만드는 가장 위대한 깨달음이 되었지요. “내가 존재한다.”는 입장을 의심하고, “나란 존재 자체가 아예 없다.”는 무아(無我)에 도달했어요.


불교의 경전 중에서 대승불교와 선불교에서 모두 소의경전으로 인정하는 『금강경(金剛經)』은 이러한 경지를 이렇게 진술합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이르신 몸의 형상이 곧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무릇 있는 바의 형상이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부처의 최고 제자인 수보리와 부처의 대화의 일부분인데요. 부처의 형상에서 부처를 볼 수 있냐는 질문에, 제자 수보리는 없다고 말하네요. 그 스승의 그 제자지요. 모든 형상 - 부처의 형상을 포함하여 - 은 허망한 것이라는 부처의 진술과 부처상 앞에서 부처님을 찾는 오늘날의 신자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요. 자신의 모습은 부처가 아니라고 말하는 부처의 도저한 부정 정신에서 모든 것을 의심하는 불교의 정수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뗏목의 비유


뿐만 아니에요. 좀 더 읽어볼까요.


어째서 그러한가? 이 무릇 중생들이 만약 그 마음에 상을 취하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달라붙게 되는 것이다. 만약, 법의 상을 취해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법이 아니라고 하는 상을 취해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을 취하지 말 것이며, 마땅히 법이 아님도 취하지 말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여래는 항상 말하였다. 너희들 비구들아,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는 자들은 법조차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님에 있어서랴!


이번에는 조금 어려운 개념이 나오네요. 일단 상(相)이라는 용어는 쉽게 말해 이미지(image)라고 생각하면 돼요. 금강경에는 네 개의 상이 나오는데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등이에요. 이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인데요. ‘아상’은 나의 경험 때문에 생긴 이미지, ‘인상’은 사람이라는 특성 때문에 생긴 이미지, ‘중생상’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이미지, 수자상은 시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생긴 이미지라고 생각하면 돼요.

예를 들어볼까요? 나는 경험을 통해서 바퀴벌레를 싫어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이미지가 고정되면 괜히 바퀴벌레 닮은 벌레만 봐도 질색을 하게 되지요. 또 인간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보면 인간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차별적으로 보게 되잖아요. 이렇게 나에서, 인간으로, 생명으로, 존재로 확장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생긴 이미지는 본래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러한 존재의 테두리 내에서 생겨난 편견일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부처는 어떠한 이미지도 취하지 말라고 충고해요. 심지어 진리라 할 수 있는 법(法)에도 사로잡히지 말라고 하네요. 왤까요? 그때의 진리라고 하는 것도 그 상태의 조건과 범위 내에서 깨달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마침내 우리는 금강경에서 제일 유명한 구절에 도착했어요. “부처의 설법은 뗏목의 비유와 같다”는 구절이요. 뗏목의 특징이 뭘까요? 그것은 강물을 건너면 그냥 버려주고 가야 하는 도구지요. 아무리 강을 건너는데 뗏목이 유용하다 해도, 강을 건너면 그뿐, 그것을 이고 갈 수는 없잖아요. 부처님 말씀이 그와 같다고 다른 사람도 아닌 부처가 말하네요. 내가 한 이야기는 삶을 살아가는 방편일 뿐, 그것을 진리로 안고 살아가지 말라는 자기부정의 정신이 이처럼 정확한 비유로 표현된 적이 없지요. 그래서 어떤 선사는 “부처님의 말씀은 우는 아이 앞에서 흔드는 종이돈에 불과하다”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베이컨의 우상


부처가 나, 인간, 생명, 존재의 조건마저도 의심했듯이, 심지어 부처의 깨달음마저 의심했듯이 의심의 경계는 끝이 없습니다. 자명한 것을 자명한 것으로 보지 않고 의심하는 용기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때로 그 용기는 만용으로 치부되면서 따돌림의 이유가 되기도 하지요. 광고에 나오는 것처럼 “모두가 예스(Yes)할 때, 나는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요.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주 드물다고 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겠네요.

부처보다 2천여 년 뒤에 활동한 서양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도 이와 유사한 고민을 했나 봐요. 그는 인간의 명석한 사고를 가로막는 그릇된 정신적 경향을 가리키는 철학용어로 ‘우상(idol)’이라고 했어요. 그는 『새로운 논리학(Nouvum organum)』 (1620)에서 인간에게 공통적인 편견인 '종족의 우상', 개인에게 특유한 편견인 '동굴의 우상', 사회집단과 모국어에 의해 조장되는 편견인 '시장의 우상', 다양한 학파가 가르치고 조장하는 편견이나 잘못된 관념인 '극장의 우상' 등을 지적했지요.


종족의 우상(Idola tribus)은 인간의 정신에 나태와 타성이 붙을 때 생기는 결함이에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돈다는 천동설 등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지요. 불교적으로는 인상(人相)에 대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네요. 동굴의 우상(Idola specus)은 개인의 경험이나 습관의 반복을 통해 형성된 정신적 결함이지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한계에 갇혀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지요. 불교적으로는 아상(我相)에 해당하는 것이겠네요.

한편 시장의 우상(Idola fori)은 언어가 만들어내는 정신적 결함이에요. 왜 시장이냐면, 시장이야말로 말로 상품을 팔고 사는 곳이잖아요. 그렇지만 시장만큼 거짓이 난무하는 곳도 드물지요. 인간은 있지도 않은 존재를 말로 만들어내고, 그렇게 만들어진 말에 생각이 갇히는 모순에 빠지지요.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Idola theatri)은 학문적 권위에 굴종하여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결함을 말해요. 왜 극장에 우상이냐면 우리는 극장에서 상영하는 연극이 거짓임을 망각하고, 거기에 흠뻑 빠져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지 못하잖아요. 극장에서 연기를 하는 연기자의 연기가 그럴듯하면 그럴듯할수록 점점 거기에 감정이입을 하고 빠져들게 되지요. 철학이나 학문이 역사적 특수성 속에서 형성된 것인데, 그것을 일반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바로 극장의 우상이지요.

베이컨은 당대의 철학적 경향을 경험주의와 합리주의가 지배하고 있다고 보았어요. 그런데 그런 경향은 모든 자료를 끌어 모으기만 하는 개미(경험주의자)나 경험과 자기 몸에서만 재료를 끄집어내어 집을 만드는 거미(합리주의자)처럼 하나에만 치우치는 철학적 태도를 비판했지요. 그리고 그는 제3의 방식, 꿀벌의 방식을 추구했어요. 꿀벌은 꽃으로부터 재료를 모으지만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소화하고 변화시켜 꿀을 만들잖아요. 이 꿀벌처럼 자신의 철학은 경험적 자료를 모아 자신의 것으로 녹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이라고 보았지요. 그래서 그의 책 제목도 그냥 『논리학(Oranon)』이 아니라 『새로운 논리학(Nouvum organum)』이라고 명명했어요.


사랑의 생물학


베이컨이 인식론의 차원에서 의심을 전개했다면, 인간의 인지에 대해서 생물학적으로 접근한 사람은 칠레의 생물학자인 움베르또 마뚜라나였습니다. 그는 1958년 하바드 대학에서 생물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어요. 그의 견해에 따르면 실재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감각적인 공통의 구성물에 불과해요. 그의 이러한 입장을 급진적 구성주의(radical constructivism)라 부르지요.


그의 입장에 따르면, 이 세상은 각각의 존재가 경험하고 구성하는 것만큼의 세계가 있어요. 예를 들어 같은 공간이라도, 인간이 구성한 것과 개가 구성한 것과 파리가 구성한 세계가 다르다는 거지요. 그리고 그중에 어느 것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게 되지요. 각자가 자신의 삶을 위해서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마뚜라나의 인식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 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를 관찰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맞게 구성하는 관찰자이지요.


“관찰자는 모든 것의 원천입니다. 관찰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찰자는 모든 지식의 기초입니다. 인간 자신, 세계 그리고 우주와 관계되어 있는 모든 주장의 기초인 것입니다. 관찰자의 소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종말과 소멸을 의미할 것입니다. 지각하고, 말하고, 기술하고, 설명하는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뚜라나, 『있음에서 함으로』 중에서


부처님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빠진 것이라고 말했을 거예요. 하지만 마뚜라나는 그렇게 구성해놓은 세계가 우리 삶의 조건이라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자고 말할 거예요. 생물학적 진화는 진보의 과정이 아니라 자연적인 표류의 의해서 만들어진 생존의 모습이라고 말하면서요. “진화란 계통발생적 선택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어나는 구조적 표류다. 이때 '진보'는 없다. 다만 유기체와 환경이 구조 접속의 관계로 남아 있는 과정 속에서 적응과 자기 생산의 보존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생명(자기조직 시스템)은 외부세계로부터 받아들인 정보를 자신의 고유한 작동에 의해 구성한 다음, 그것을 다시 외부에 부여하지요. 그것을 마뚜라나는 ‘자기 생산(autopoiesis)’이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그는 그렇게 생산해놓은 세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고 말했지요. 왜냐하면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 구성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함이 곧 앎이고, 앎이 곧 함이다.”

마뚜라나의 생물학이 궁극적으로 요청하는 것은 ‘사랑’이에요. "생물학적으로 볼 때 사랑 없이, 남을 받아들임 없이 사회적 과정이란 있을 수 없다." 또한 "우리들이 가진 세계란 오직 다른 이들과 함께 내놓는 세계뿐이다. 그리고 오직 사랑의 힘으로만 우리들은 이 세계를 내놓을 수 있다." 이러한 마뚜라나의 생물학을 ‘사랑의 생물학(the biology of loving)’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러할 때 우리는 인류를 ‘사랑하는 인간(homo sapiens amans)’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다시 회의하라


객관적 세계 – 칸트라면 ‘물 자체’라고 표현했을 – 에 도달하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걸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고, 살고 있는 세계는 원래 그런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의해서 만들어지고 구성된 하나의 상(image)에 지나지 않는 걸까요? 그러면 데카르트가 이야기하는 ‘생각하는 나’, ‘존재하는 나’라는 개념도 하나의 상(相)이요, 베이컨이 경고했던 우상 또한 하나의 상(相)이라는 걸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인식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우리의 실천은 어디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걸까요? 다시 수없이 많은 질문이 만들어지네요.


“그리하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연설한단 말인가? 상을 취하지 말라. 있는 그대로 움직이지 말라. 어째서 그러한가?

모든 지은 법이여!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네.
이슬과 같고

또 번개와 같아라.

그대들이여

이 같이 볼지니.”


『금강경』의 최후진술은 위와 같이 끝나요. 우리가 알고 있고, 살고 있는 이 세상을 하나의 꿈(dream)이요, 환영(illusion)이요, 거품(bubble) 같이 보라네요. 그림자(shadow)요, 이슬(dew)이요, 번개(flash of lightening) 같이 보라네요. 상(相)을 취하지 말라네요. 그러면 어디에 우리의 거처를 둬야 할까요? 금강경의 지혜는 이렇게 말합니다. “머물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生其心)” 참 어려운 지혜지요. 불가의 지혜는 거처 없이 살아가는 겁니다.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않되, 마음을 내는 상태! 확신 없이 깨어있는 상태! 늘 회의하되 절망하지 않고 사랑의 마음을 갖는 상태! 우리의 인문학은 그 어디쯤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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