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십계명 9 : 비상하라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을 중심으로

by 김경윤

대지의 긴박(緊縛)으로부터 넘어서려는 노력은 인류의 오래된 꿈이었습니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의 신화는 인류의 비상의 오랜 염원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카로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충고도 또한 전해집니다.

추락하는 이카로스

“너무 낮게 날지 마라. 바다의 물기가 너의 날개를 무겁게 만들 것이다. 너무 높게 날지 마라. 너의 날개를 붙이고 있던 촛농이 녹을 것이다.”


이카로스는 아버지의 충고를 무시하고 비상에 도취되어, 태양 가까이 날다가 날개가 녹아 결국 바다로 추락하고 말지요. 비상의 꿈은 좌절된 것일까요? 그럴 리가요. 그 후로도 많은 몽상가들이 도전했고, 과학자들이 실험을 했지요. 위대한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를 보면 이 불후의 예술가 역시 비상을 꿈꾸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다가 인류가 실제로 자유롭게 날 수 있게 된 것은 라이트형제의 비행기발명 덕분이지요. 이후로 인류는 급속도로 빠르게 비행의 역사를 바꿔 써내려갔지요. 이제는 음속을 뚫고 비행하는 초음속기도 나왔고, 심지어 지구 밖을 떠나 우주를 비행하는 우주비행선도 나왔으니 이 정도면 비상의 꿈을 완전히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한편 예술 세계 또한 비상을 꿈꿉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을 최대한 자유롭고 가볍게 만들어 비상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려했던 발레리나의 유연한 몸짓에서도 확인될 수 있지요. 그리고 무수히 많은 철학서적과 문학작품 속에서도 비상을 꿈꾸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동양철학자 장자의 『장자』의 처음에 등장하는 붕새이야기로부터, 서양철학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독수리(새)이야기까지, 비상은 인류에게 무수히 많은 영감을 주었지요. 비트겐슈타인은 비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계를 영원의 모습 아래에서 포착하는 데에는 예술가의 작업 외에도 또 다른 것이 있다. 내가 믿기로는, 그것은 사유의 길이다. 그 것은 말하자면 세계 위로 날아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있게 한다. 세계를 위에서 날며 바라보며.”


이번에 우리가 다룰 주제는 ‘비상하라’입니다. 우리가 주로 다룰 작품은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stone Seagull)』이지요. 리처드 바크는 1936년에 미국의 일리노이주 오크파크에서 출생했습니다. 롱비치에서 성장했으며 롱비치 스테이트 칼리지에 입학했으나 그곳에서 퇴학당한 후 공군에 입대하여 파일럿이 되었지요. 1958년에는 자유기고가로 활동하였으며, 3천 시간 이상 비행했지요. 그의 비행기록은 『갈매기의 꿈』을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겠지요. 이 작품은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많은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러면 조나단을 따라 자유를 향한 여행을 떠나볼까요.


먹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라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본 듯한 이 고리타분한 질문은 의외로 깊이가 있습니다. 누구나 살기 위해서 먹는다고 대답하지만, 실제 삶을 살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의미나 목적은 망각한 채, 하루하루 그냥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 드뭄의 이유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다가는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못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두려움 때문이지요. 특히 물신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어야한다는 강박 때문에, 돈이 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는 평가를 받게 되지요. 과연 삶의 가치는 무엇으로 평가받아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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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조나단은 보통 새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갈매기들은 난다는 행위를 지극히 간단하게 생각하여, 그 이상의 것을 굳이 배우려 하지 않았다. 즉 어떻게 해서 기슭에서 먹이가 있는데까지 날아갔다 또 돌아오는가, 그것만 알면 충분한 것이다. 모든 갈매기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나는 일이 아니라 먹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별난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먹는 일보다도 나는 일 그 자체였다. 그 밖의 어떤 일보다도 그는 나는 일을 좋아했다.(강조-인용자) 그런 종류의 생각을 하고 있으면 동료들이 묘한 눈으로 보리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아무튼 그의 부모들조차도 그가 매일같이 혼자서 아침부터 밤까지 수백 번이나 저공 활공을 되풀이하여 시도하는 것을 보고는 당황하고 있었다.


다른 갈매기들은 먹기 위해서 납니다. 하지만 조나단은 나는 일 그 자체가 중요하지요. 나는 일은 조나단에게는 수단이 아니라 삶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주위의 갈매기들은, 심지어 그의 부모들조차도 이러한 조나단의 모습을 우려하고 당황합니다. 『장자』에도 이와 유사한 대목이 나옵니다. 높이 날고 있는 붕(鵬)을 바라보며 매미와 메추라기들이 조롱을 하지요. “뭐하려고 저렇게 높게 나는 것일까? 우리는 저렇게 높게 날지 않아도 먹을 거리를 충분히 구할 수 있는데 말이야.” 조나단 부모의 우려도 이러한 것들이지요.


“왜 그러니, 존, 대체 왜 그래?” 어머니는 아들에게 물었다. “왜 너는 다른 갈매기 떼들처럼 행동하지 못하니? 저공비행 따위는 펠리컨이나 앨버트로스에게 맡겨 두면 되잖니? 그리고 왜 너는 먹지 않니? 바짝 말라 뼈와 깃털뿐이잖아!” “뼈와 깃털뿐이라도 괜찮아요, 엄마. 나는 내가 공중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를 알고 싶을 뿐이에요. 단지 그것뿐이에요.” “이봐라, 조나단”하고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아버지가 말했다. “머지않아 겨울이 닥쳐온다. 그렇게 되면 어선도 적어질 것이고, 얕은 데 있는 고기도 점점 깊이 헤엄쳐 들어갈 것이다. 만약 네가 연구해야 한다면 먹이를 연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얻는지를 연구해라. 물론 너의 그 비행술인가 하는 것도 좋지만, 그러나 너도 알다시피 공중활주를 먹고 살 수는 없지 않니? 안 그래? 우리가 나는 이유는 먹기 위해서라는 걸 잊지 말아라. 알겠지?”


어머니의 걱정은 자식이 튀는 것입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라는 속담처럼 행동의 평범성을 바라는 거지요. 아버지의 걱정은 자식이 세상물정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식의 행동이 장기적 계획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순간의 충동에서 빚어진 것이라 착각하고 세상의 법칙에 충실한 하나의 평범한 갈매기가 되기를 바라는 거지요. 사회 시간에 배운 용어를 기억해보자면, 사회화과정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어머니의 신체에 대한 걱정, 아버지의 장래에 대한 걱정은 비단 조나단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청소년과 젊은이들에게 던져지는 것들이지요. 또한 대부분의 청소년과 젊은이들은 이러한 걱정을 애정으로 받아들이고 부모의 소망대로 자신의 꿈을 접고 살아갑니다. 평범성을 획득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지체하는 이유는 먼 곳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가까운 곳, 바로 가족 때문이지요. 가족은 고단한 인생에 피난처가 될 수 있지만, 머나먼 여정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나 부처 등 성인이 출가를 했던 이유는, 가족이 싫어서가 아니라 가족의 테두리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의 10계명‘ 중에 9번째 계명이 “부모나 아내, 그리고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라고 합니다.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나요?


탈족하라!

한자로 ‘족(族)’은 뼈와 힘줄이 이어져 있는 부분을 뜻합니다. 그 결합이 하도 강력하고 완고해서 왠만한 힘으로는 끊어내기가 힘들지요. 가족(家族)은 ‘집’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뭉쳐진 집단이지요. 혈족(血族)은 피로 뭉쳐진 사이이고, 부족(部族)은 지역으로 똘똘 뭉쳐진 사이입니다. 근대에 와서는 민족(民族)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단단히 결합된 단위를 뛰어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삶의 비상을 꿈꾸려면 반드시 넘어서야할 경계처이지요.

이상적인 종교나 운동을 꿈꾸웠던 사람들은 모두 이 경계처를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종교에서 출가(出家)는 바로 탈(脫)가족주의 선언에 다름 아닙니다. 예수의 선언은 급진적이다 못해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그 어미와, 며느리가 그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그 집안 식구니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태복음 11장 34~37절)


한편 세속적으로 가장 급진적인 운동이었던 공산주의 운동은 민족단위를 뛰어넘어 “전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고 외칩니다. 나는 이러한 흐름을 ‘탈족(脫族)의 흐름’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비상(飛翔)은 자신의 근거지를 뛰어넘는 탈족(脫族)의 용기입니다. 이전에 맺어왔던 관계와 흐름과 단절하고, 새로운 흐름에 자신의 몸을 기꺼이 맡길 줄 아는 자만이 비상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지요.

갈매기 조나단의 비상은 이전 갈매기들의 날갯짓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전 갈매기들의 날갯짓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지만, 조나단은 가장 높게 가장 빠르게 가장 멀리 날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전의 갈매기들이 보여주었던 비행술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 마라


하지만 갈매기 조나단의 비행시도가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문제를 푸는 열쇠는…….”하고 그는 물에 흠뻑 젖은 채 생각했다. 중요한 점은 고속 강하하는 동안에 날개를 움직이지 않고 있는 일이다. 그렇다, 시속 80킬로미터까지는 날개를 쳐도 그 이상이 되었을 때는 날개를 편 채로 가만히 놓아두면 된다! 600미터 상공에서 그는 다시 해보았다. 몸을 기울여 강하하고 이어 시속 80킬로미터를 돌파하자, 그는 부리를 곧장 아래로 향하고 날개를 완전히 편 채 고정시켰다. 이렇게 하기에는 굉장한 힘이 필요했지만, 효과는 만점이었다. 10초쯤 되자 시속 140킬로미터 이상에 달하고 머리가 멍해졌다. 바로 그 순간, 조나단 리빙스턴은 갈매기의 세계에서 신기록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승리는 순간적인 것이었다. 급강하한 후 수면과 평행으로 날고자 했을 때, 고정시킨 양쪽 날개의 각도를 바꾸려고 한 순간에, 그는 먼젓번과 같은 그 위험한 조종불능의 재난에 빠져든 것이다. 그것은 시속 140킬로미터라는 스피드 속에서 다이너마이트 같은 타격을 그에게 안겨 주었다. 그리하여 조나단은 파열한 것같이 되어 벽돌처럼 단단한 해면에 세차게 곤두박질친 것이다.


승리의 순간에 이어진 추락과 부상의 경험! 갈매기 조나단에게 이 사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우리가 우러러보는 대부분의 성공신화들은 실패의 이야기를 많이 감추고, 성공의 이야기들을 극대화하여 가장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그래서 성공이야기를 담은 무수히 많은 책을 사서 그것을 실천해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실패하고, 성공하는 사람은 그 책을 쓴 사람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전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갈매기 조나단이 비상에 성공한 것은 한 두 번의 시도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비행술에 대한 전혀 다른 접근법에 의거한 것이었습니다. 갈매기 조나단은 수없이 많은 실패를 한 후 낙담을 하고 갈매기 공동체로 돌아갈 마음을 먹게 됩니다. 자신의 행위를 ‘맹목적 충동’으로 생각하고, 절망 가운데서 귀가하던 중 아주 낯선 경험과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 순간을 조나단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둡다! 그때 공허한 목소리가 경고하듯 들려 왔다. 보통 갈매기는 결코 어둠 속을 날지 않는다!

조나단은 멍해져서 그 목소리에 주위를 기울이지 않았다. ‘멋있다’라고 그는 생각하며 황홀해져 있었다. 달도 먼 불빛도 반짝반짝 물위에 흔들리며, 밤 속으로 희미한 빛줄기를 던지고 있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고요하기만 하다. 내려가라! 또 공허한 목소리가 들렸다. 갈매기는 결코 어둠 속을 날지 않는다! 만약 네가 어둠 속을 날도록 타고났다면, 올빼미 같은 눈을 갖고 있어야 한다! 눈을 감고도 정확히 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매의 짧은 날개를 갖고 있어야 한다! 밤중에, 30미터의 높이로 날면서 조나단은 갑자기 눈을 깜빡거렸다. 조금 전까지의 고통과 결심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짧은 날개, 매의 오므라진 짧은 날개!

그것이 해답이다!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필요한 것은 짧은 날개뿐이다. 날개의 대부분을 접고, 남겨진 그 끝으로만 난다! 짧은 날개! 그것이 전부다!


불가에서는 무아(無我)의 경험이라 할만하고, 장자의 표현에 따르면 망아(忘我)에 상태라 할 수 있는 순간! 이전의 시도가 아무런 소용이 없어져, 더 이상 그 어떤 시도도차 불가능하다고 절망하는 순간! 그래서 자신의 고집이나 지식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순간! 갈매기 조나단은 변신의 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갈매기가 아니라 ‘매-되기’! 현대철학자 들뢰즈는 이 ‘되기’라는 개념을 통하여 생의 능동성과 창조성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고정된 흐름이 아니라 유연한 흐름을 타고, 자신의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이자 실천, 그래서 변화 가운데서 새로움을 찾아내려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되기’입니다. 이 ‘되기’는 동일성의 차원이 아니라 차이의 차원에서 탐색됩니다. 조나단 식으로 말해보면 ‘조나단-갈매기 되기’가 아니라 ‘조나단-매되기’ 쯤 되려나요. 갈매기로서의 동일성을 잃고, 매라는 차이(이질성)와 접속했을 때, 조나단은 새로운 비행술을 획득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비상의 삶은 동일성을 강화하는 과정이 아니라 차이를 생성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갈매기 조나단의 정체성이 사라지자, 매-조나단이 탄생합니다. 기적의 순간이지요.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라


조나단의 비상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삶이 즐거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비상을 꿈꾸는 자는 그 일족으로부터 추방되고, 가난에 시달리며, 위험 속에 노출되면서 위태로운 삶을 살 수밖에 없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갈매기 조나단에게도 그러한 순간이 다가옵니다.


억양을 붙인 엄숙한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려 왔다. “너는 갈매기 족의 존엄과 전통을 더럽혔다.” 불명예의 조목으로 중앙에 끌려 나온다는 것은 갈매기 사회로부터 추방되어 ‘먼 벼랑’에서 혼자 살아가도록 유형에 처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조나단 리빙스턴, 너도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무책임한 행위는 보상받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의 삶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알고 있는 것은 다만 우리가 먹이를 찾고, 그래서 가능한 한 살아 남도록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뿐이다.”


갈매기 조나단은 갈매기 공동체로부터 추방됩니다. 비상의 대가는 혹독합니다. 예수가 종교적 공동체에게 따돌림을 당하듯이, 새로운 창조는 당대에 늘 외면당하기 마련입니다. 나는 이러한 사례에 잘 어울리는 철학자 한 명을 알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 1632~1677)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에티카(Ethica)』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이 철학자는 유대교적 교리와 그리스도교적 교리가 현대사상과는 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무신론적 입장에서 신학적 주제를 탐구했습니다. 그에 대한 종교계의 대응은 추방이었지요. 그래서 그는 이후 죽을 때까지 암살위협에 시달리면서, 스스로 렌즈를 깎아 밥벌이를 해야하는 극빈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를 추방한 유대인 공동체의 추방문이 지금도 전해지는 데 조금만 읽어봐요 무시무시합니다.


“천사들의 결정과 성인들의 판단에 따라, 거룩한 신과 거룩한 공동체 전체의 동의를 받아서 우리는 스피노자를 파문하고, 증오하고, 저주하고, 쫓아낸다.(…)

여호수와가 예리코를 저주한 것과 같은 저주와, 엘리사가 소년을 저주한 것과 같은 저주와, 율법 책에 쓰여진 온갖 저주의 말을 다한다. 낮에도 저주를 받고, 밤에도 저주를 받고, 누울 때도 저주를 받고, 일어날 때도 저주를 받으라. 나갈 때도 저주를 받고, 들어올 때도 저주를 받으라.

신이 그를 절대로 용서하지 마시기를, 이 남자를 향해 신의 분노와 원한이 터져 나오기를, 그리고 하늘 아래서 그의 이름을 지우기를, 신이 그를 이스라엘의 모든 종족에게서 분리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이에, 아무도 입으로나 문서로 그와 교제하지 말 것, 그에게 그 어떤 은총도 베풀지 말 것, 그와 한 지붕 아래 쉬지 말 것, 그의 가까이 4엘레(약3미터)안으로 들어가지 말 것, 그가 작성했거나 쓴 문서를 읽지 말 것을 명령한다.”


이 저주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는 수많은 사람과 우정을 나누며 자신의 철학을 계속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고, 현대철학에 많은 영감을 주었지요. 노나라에서 추방된 공자에게 동지이자 제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그래서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를 ‘벗과 함께 하는 즐거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일라고 『논어』에 고백했듯이, 동지이자 친구이자 제자들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큰 위안과 힘이 됩니다. 만약에 예수에게 12명의 제자가 없었다면, 부처에게 수많은 도반(道伴)이 없었다면 그들의 종교적 갱신과 시도는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고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니 비상을 시도하려는 자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함께 비상을 시도할 수 있는 새로운 길벗들입니다.


한국의 철학자 김영민은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의 필요성을 일찍이 느끼고 수없이 많은 공부공동체와 ‘동무공동체’를 실천해 왔습니다. ‘동무’라는 말이 우리에게 낯설어 보이는 이유는, 그 뜻이 가지고 있는 아련함보다는 그 단어에 덮씌워진 이념적 충격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김영민은 현대사회를 인문학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실천적 방편으로 ‘동무’를 부활시키고 있습니다. 김영민은 “좁고 관습적인 회귀의 회로 속에서 우리의 존재가 구겨져 들어가는 사회화에 대한 탄력적이고 현명한 저항의 길, 그것이 곧 동무의 길”이라 말하며 ‘동무’란 “새로운 인문주의적 회로의 미래적 비전이며, 그 쉼없는 재구성의 기획”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굳이 김영민의 현란한 언어를 빌려말하지 않더라도, 힘겨운 삶을 살아가면서 1차적 집단인 가족과는 다른 새로운 관계의 모색은 항상 필요합니다.


추방당한 갈매기 조나단에게 새로운 친구가 찾아와, 그를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하는 모습은 그래서 장관이자, 위로입니다.


조나단은 수평 비행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잠시 말이 없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굉장하군.”하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너희들은 누구지?” “너와 같은 무리에서 왔어, 조나단, 우리는 너의 형제들이야.” 그 말은 힘 있고 침착했다. “우리는 너를 더 높은 데로, 너의 진정한 고향으로 데려 가려고 온 거야.” “나는 고향이 없어. 동료도 없어. 나는 추방당했어. 그리고 우리는 지금 '성스러운 산바람'의 가장 높은 데를 날고 있는데, 나는 이제 더 이상 몇 백 미터도 이 늙어빠진 몸으로는 더 높이 날 수가 없어.”

“하지만 할 수 있어, 조나단. 너는 나는 것을 배웠으니까 이 교육 과정은 끝났어. 새로운 교육 과정을 시작할 때가 온 거야.” 지금까지 언제나 그의 머릿속에는 뭔가 곧잘 순간적으로 번뜩였는데, 이때도 조나단은 이내 깨달았다. 그들의 말이 옳다. 자기는 더 높이 날 수 있다. 자기의 진정한 고향으로 갈 때가 온 것이다.

그는 마지막 긴 시선을, 자기가 그렇게도 많은 것을 배운 하늘과 장엄한 은빛 대지에 보냈다. “좋아, 가자.” 마침내 그는 말했다. 그리하여 조나단 리빙스턴은 별처럼 빛나는 두 갈매기와 함께 높이 떠올라 어두운 하늘 저쪽으로 사라져 갔다.


새로운 천국을 만들라


조나단이 낯선 갈매기에게 이끌리어 올라간 세계는 이전의 세계와는 다릅니다. 이전 세계는 조나단이 가장 빨리 날 수 있었던 세계였지만, 이곳은 조나단이 새롭게 배워야할 것이 너무도 많은 세상입니다. 이곳에서 비행술(?) - 차라리 비행도(道)라고 하는 것이 좋겠네요. -을 배운 조나단은 생각의 속도로 날 수 있었고, 심지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기술이 아니라, 날아감의 개념이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그 배움의 한 대목을 소개해볼까요.


“치앙, 여기는 천국이 아니죠, 그렇죠?” 노선배는 달빛 속에서 미소지었다. “꽤 알게 된 것 같군, 조나단.” “이 생활 다음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갈까요? 천국이라는 곳이 사실은 아무데도 없는 것 아니에요?”

“맞았어. 조나단, 그런 곳은 없어. 천국이란 장소나 시간이 아니라 완전한 경지를 가리키는 것이니까.”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물었다. “너는 굉장히 빠르게 날지. 안 그래?”

“나는…… 나는 다만 스피드를 좋아해요.” 조나단은 대답했다. 노선배가 자기를 알아주었다는데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또 자랑스러운 기분이기도 했다. “알겠니, 조나단? 네가 정말 완전한 스피드에 이르렀을 때, 너는 바로 천국에 닿으려 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완전한 스피드라는 건 시속 수천 킬로미터로 나는 일도, 백만 킬로미터로 나는 일도, 또 빛의 속도는 나는 일도 아니야. 왜냐하면 아무리 숫자가 커져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완전한 것은 한계가 없지. 완전한 스피드란, 알겠니, 그건 곧 거기에 있다는 거야.”

뜻밖에 치앙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별안간 150미터 떨어진 바닷가에 나타났다. 섬광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다시금 그의 모습은 사라져서 아까처럼 1천분의 1초 동안에 조나단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노선배의 놀라운 비행을 경험한 조나단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아니 비행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배운 조나단은 얼마나 축복된 존재일까요? “천국은 아무데도 없다(nowhere).”는 진술은 천국이 특정한 장소나 시간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완전한 경지에 도달한 ‘지금-여기(now-here)’임을 새롭게 깨닫게 해주지요. 불가에서는 이러한 경지를 ‘여여(如如)’한 경지라고 말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비상에 경지에 도달한 조나단이 자신을 추방했던 갈매기의 집단으로 되돌아간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홀로-깨달음’에 상태에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깨달아감’의 즐거움을 선택하는 과정이지요. 예수가 광야에서 깨달음을 얻고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들을 모았듯이, 부처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고 이전 동료를 찾아가 초전법륜(初轉法輪)을 설파했듯이, 조나단의 비상은 새로운 공동체의 확산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낯선 곳에서 천국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자신이 속했던 것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천국을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자신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확산되기 마련입니다. 샘물이 끊임없이 물을 쏟아내어 밖으로 흘려보내듯이, 사랑 또한 그러한 것이니까요(에리히 프롬). 그런 점에서 사랑은 이기심이 아니라 자기애의 표현이지요.


자유 이외의 모든 것을 거부하라


새로운 존재 조나단은 이제 ‘자유 그 자체’가 됩니다. 그는 자신에게 배움을 청하는 갈매기들에게 단순한 진리를 말합니다. “즉 갈매기에게 있어서 나는 것은 정당한 일이고, 자유는 갈매기의 본성 그 자체이며, 그 자유를 방해하는 것은 의식이든 미신이든, 또 어떤 형태의 제약이든 파기해야 한다고.” 이러한 진술은 마치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제자들이 안식일에 지켜야할 법률을 어기고 있다고 고발하자, 예수가 한 말,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응수했던 것과 유사합니다. 기존의 틀에 갇혀 있던 사람들에게 이 말은 너무도 무시무시한 말이었음에 분명합니다.


“파기해도 됩니까?”하고 군중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말했다. “그것이 비록 갈매기 집단의 법률일지라도?” “진정한 법률이라는 것은 자유에로 인도해 주는 것뿐이야.” 조나단이 말했다. “그 이외의 법률은 없어.” “어떻게 당신은 우리도 당신처럼 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당신은 다른 새와는 바탕이 달라요. 특이하고 재능 있고, 신성한 갈매기가 아닙니까.”

“플레처를 보시오! 로웰을! 찰스 폴랜드를! 주디 리를 보시오! 그들도 모두 특이하고 재능 있는 갈매기인가요? 당신들과 같아요. 나와도 같아요. 한 가지 다른 점은, 그들은 진정한 자기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그것을 위해 연습을 이미 시작하고 있다는 것뿐이요.”


진정한 자유는 특정한 능력이 가지고 있는 소수만이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고 그것을 연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지점에서 우리가 할 일은 남들이 원하는 자기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진정한 자기가 무엇인지 탐색하고, 그것을 위해 연습을 시작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때 우리는 조나단이 자신의 제자인 플래처에게 가르침을 주고 떠나며 했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용기를 내어 또 다른 조나단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되지요.


“존, 당신은 나더러 그 역할을 하라는 겁니까? 나는 그저 평범한 갈매기일 뿐이에요. 당신은…….” “ ‘위대한 갈매기’의 외아들인가?” 조나단은 한숨을 쉬고, 바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미 네게는 내가 필요하지 않아. 네게 필요한 것은 매일 조금씩 자기가 진정하고 무한한 플레처임을 발견해 가는 일이야. 그 플레처가 네 교사야. 네게 필요한 것은 그 스승의 말을 이해하고, 그가 명하는 바를 행하는 일이야.”

순간 조나단의 몸은 공중으로 떠올라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점차 투명해져 갔다. “그들에게 나에 관해 어리석은 소문을 퍼뜨리거나, 나를 신처럼 받들게 하지 말아 주게. 알겠나, 플레처? 나는 갈매기야. 나는 그저 나는 것을 좋아할 뿐이야. 아마…….” “조나단!” “알겠지, 플레처. 너의 눈이 가르쳐 주는 것을 믿어서는 안 돼.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허위야. 너의 마음의 눈으로 보는 거야. 이미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찾아야 해. 그러면 어떻게 나는지를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위대한 비상의 첫걸음은 비상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상을 위해 연습하면서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도해볼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고정관념과 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는 다른 타자들과 끊임없는 접속을 통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고, 자신을 변신시킬 수 있는 ‘되기’의 능력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할 벗들과 새로운 공동체를 꾸려 함께 새로운 비상을 연습해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제자가 스승이 될 수도 있으며, 스승 또한 나의 벗임을, 내 속에 위대함이 온전히 있었음을 깨닫게 되겠지요. 적어도 소설 『갈매기의 꿈』은 그러한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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