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신곡 2 : 현대인의 비극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 대한 명상

by 김경윤

내 영혼을 보살펴라

- 소크라테스

그리스의 비극은 장엄합니다. 주인공이 영웅적 인물일 뿐만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비극적 상황은 운명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지요. 주인공은 그 운명이 비극인지도 모른 채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요. 일례로 오이디푸스는 거리에서 자신을 낳은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한 지조차 모르지요. 나중에야 사실을 깨닫게 되고 비참의 나락으로 추락합니다. 그러한 비극을 감상하며 관객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눈물이 ‘카타르시스’ 즉 정화(淨化)의 효과가 있다고 말했어요.

그에 비해 우리 시대의 비극은 농담거리처럼 초라합니다. 현대비극의 대표적 작품인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을 보면 우리 시대의 비극의 실체를 정확히 진단할 수 있습니다. 성공을 위해 자신의 삶을 다 던졌지만 결국 자살에 이르고만 윌리의 운명은 우리에게 삶의 무게와 의미에 대해 다시 묻게 만들지요.

윌리는 평생을 세일즈맨으로 살아갑니다. 세일즈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함과 인맥이지요. 그렇게 성실하게 세일즈를 하며 인맥을 쌓아가던 윌리에게 돌아온 대가는 본사의 간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방을 장거리 출장가야 하는 초라한 현실이었습니다. 회사도 변하여 젊은 사장이 자리를 차지하면서 자신도 언제 방출될지 모르게 됩니다. 윌리는 자신의 입지가 점차로 줄어드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려요. 자신이 어렸을 적 마차로 유랑하며 정착지를 찾던 시절은 얼마나 행복했던지. 가난한 행복을 꿈꾸는 윌리의 상상적 과거도피는 결코 현실화될 수 없었어요. 게다가 가족과의 관계도 원만한 것이 아니었어요. 장남인 비프는 거물 사업가라 되라는 아버지의 소망과는 달리 현실에서 무기력하고 무능한 ‘이상주의자’였지요. 그로 인해 아버지 윌리와 항상 말다툼을 벌여요. 흔히 그렇듯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은 격렬한 양상을 띠지요. 자식에 대한 기대와 그에 따른 절망은 그들 사이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지요. 회사에서 무자비하게 해고된 뒤, 자식에게 사업밑천을 대주기 위해 결국 선택한 아버지 윌리의 자살은 영웅적인 선택이 아니었어요. 부성애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비참한, 자식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결코 놓지 않은, 그래서 끝끝내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찾고 싶은, 소시민의 절규와 같은 것이지요.


경제성장기에 한 소시민적 가정의 행복은 대공황의 시기를 맞아 급전직하(急轉直下)해요. 고대 비극의 운명은 신이 결정하지만, 현대의 비극은 경제가 결정하지요. 부모세대의 성공에 대한 집착은 결코 자식세대까지 이어지지 않아요. 부모세대의 삶과 자식세대의 삶은 결코 일치할 수가 없었어요. 부모세대의 행복은 거대한 저택, 번쩍이는 차, 고급스런 가구였어요. 한때 윌리가 소유한 것들 말이에요. 그러나 자식세대는 그런 것을 꿈꾸지 않아요. 현실이 될 수 없는 것을 알아차린 거지요. 그래서 윌리의 아들 비프는 이렇게 절규해요.


“왜 원하지도 않는 존재가 되려고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거야? 왜 사무실에서 무시당하고 애걸해 가며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거야? 내가 원하는 건 저 밖으로 나가 내가 누군지 알게 되는 그때를 기다리는 건데! 전 왜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거죠, 아버지?”

아버지 윌리는 자식의 반항을 견딜 수 없었죠. 그래서 증오심에 가득 차서 이렇게 외쳐요.


“네 인생의 문은 활짝 열려 있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닌가요?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한테 수없이 외쳤던 소리 아닌가요? 정말 그럴까요?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활짝 열려있을까요? 부모가 자식에게 주입했던 ‘거짓된 꿈’이 아닐까요? 아버지의 외침에 비프는 냉정하게 대꾸하지요.


“아버지! 전 1달러짜리 싸구려 인생이고 아버지도 그래요!”

그대라면 이 대꾸에 뭐라고 하실지 궁금하네요. 윌리는 자신이 ‘싸구려 인생’임을 온몸으로 부정하지요. 그리고 그 부정의 결과가 자살이라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구요. 작가 아서 밀러는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기를 배경으로 성공을 향해 치닫던 한 가족이 결국 비극에 도달하게되는 상황을 치밀하게 그려냄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했어요. 성공이라는 엔진에 브레이크를 걸었던 작가이지요.


자, 이제 호흡을 가다듬고 속도를 줄여볼까요.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보지요. 우선 자신의 아이들이 있다면 아이들을 떠올려보세요.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에 우리는 대부분 이렇게 말하지요. “아무쪼록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생물학적으로 아직 위험한 시기였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그때는 이 말이 진심이었을 거예요. 그러다가 아이들이 성장하면 우리는 아이 자체의 건강보다는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아이들이 더 똑똑했으면 바라지요. 멍청한 자식보다는 똑똑한 아이가 부모에게 큰 기쁨을 주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렇게해서 더 똑똑해지는 경쟁의 대열에 아이들을 밀어 넣지요. 여기서부터 아이들의 욕망이 아니라 부모의 욕망이 작동하는 시기지요. 학원이다 과외다 아이들의 등을 떠미는 것은 아이의 욕망이 아니에요. 전적으로 부모의 욕망이지요. 무엇에 대한 욕망일까요? 좋게 말하면 자식이 경쟁에서 승리해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욕망이구요. 좀더 솔직히 말하면, 그런 자식을 둔 부모가 되어 사회적으로 칭찬을 받기를 바라는 구석도 있을 거예요. 이런 욕망이 구조화되면 자식은 부모의 눈치를 보게 되고, 부모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지요. 결국 아이는 사회적 욕망에 지배당하는 부모의 욕망에 지배당하는 이중적 욕망의 대리물로 전락하는 셈이지요.

이 욕망의 대리물로써 충실하게 자식이 살아갈 때 부모는 기뻐하고, 반항할 때 부모는 분노해요. 그러니까 부모의 분노는 자식이 원인이 아니라 부모의 욕망이 원인이 되는 거예요. 자식으로서는 억울하고도 황당한 일이지요. 원인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서 나오는 것의 결과를 자신이 책임져야하는 사태니까 말이에요.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그러한 욕망이, 사회적 욕망이든 부모의 욕망이든 정당하고 합당하냐는 거지요.

윌리의 삶을 기억한다면 성공으로 치닫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회도, 그러한 목표에 동의하고 자신의 삶을 살았던 윌리도 결국 파국이 이르러요. 영원히 성장할 줄 알았던 경제는 대공황을 맞이하고, 윌리는 직장에서 쫓겨나 몰락하는 운명이 되었잖아요. 결국 성공이라는 목표는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정당하지도 합당하지도 않은 거지요.

그러니 아이의 행복을 바란다면 아이에게 투사된 자신의 욕망을 회수하길. 그리고 본래 ‘건강하기만 바란다’는 소망을 회복하길. 아이를 다른 아이와 비교하지 말고, 타인의 눈치 따위는 과감히 떨쳐내는 용기를 갖게 되길 기대해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 스스로가 강해져야겠지요.


성공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구조적으로 탈선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성공하려면 경쟁을 해야하고, 경쟁하려면 많은 것들을 물리쳐야하기 때문이지요. 승자독식. Winner takes it all! 이것이 성공의 공공연한 비밀이에요. 한 사람이 만인을 위해 일하는 사회가 아니라 만인이 한 사람을 위해 일하는 사회가 건강할까요? 게다가 그 최종적 승자마저도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위험한 사회에서 말이에요.

윌리의 비극은 윌리의 자살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꿈꾸는 욕망이 자식에게 대물림될 때 비극 또한 대물림되지요. 그래서 나는 아버지 윌리의 신산한 삶을 추모하지만, 윌리와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는 자식 비프에게 기대해봅니다. 그래서 인생이 한갓 농담거리나 비웃음거리가 아니라 살만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러한 말을 하기에는 수없이 많은 난관을 통과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불러놓고 한 번 이런 이야기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원하지 않는 존재가 되려고 난리치지 마라.”

“때로 밖으로 뛰쳐나가라.”

“서두르지 말고, 네가 누군지 알게 되는 그때를 기다려라.”



keyword
작가의 이전글중년 신곡 1 : 중년, 빛과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