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신곡 1 : 중년, 빛과 그림자

단테의 <신곡> 명상

by 김경윤

우리네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나는

어두운 숲 속에 있었다.

- 단테, <신곡> 지옥편 1

낙엽이 떨어지는 스산한 가을에 단테의 <신곡>을 읽고 있어요. 단테가 중년이 되었을 즈음에 썼다는 작품이지요. 반생애를 살다보면, 앞으로 가야할 길을 잃고 뒤돌아보기도 하나 봐요. 내가 가는 길은 옳은 길인가? 아니면 잘못 살아왔나?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뭐 이런 질문을 던지기에 딱 맞는 계절이고, 딱 맞는 나이가 아닌가 싶네요. 가을과 중년이라…….


10대의 소년기를 지나, 20대의 청년기를 거쳐 30대가 되면 장년기가 되지요. 중년이라면 아마도 4, 50대의 인생시기를 말할 거예요. 저는 이제 중년기의 반을 지나고 있어요. 생을 돌아보면 아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네요. 살면서 힘든 고비가 많았지만 그럭저럭 잘 넘긴 것 같기도 하고, 조금만 더 열심히 살았더라면 지금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생각도 들고, 어떤 시인 말마따나 “나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라는 말도 안 되는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기도 하고 말이에요. “지금 알았던 것을 그때에 알았더라면”하고 후회되기도 하고요. 너무 물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단단하게 삶을 장악하고 있지도 못한 시기가 바로 중년이 아닌가 싶어요.

인간에 비하면 중년의 나무는 얼마나 위대한지. 중년은 나무로 치면 가을나무지요. 자신의 양분을 열매에게 주고, 자신의 수분은 땅에게 돌려주고, 생의 두 번째 찬란한 빛을 뽐내고 그것마저 내려놓아야할 시기. 그래야 추운 겨울을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재생을 꿈꾸는 시기이지요. 나무는 그렇게 자신의 생애를 옹골차게 가꾸어가며 신생新生을 꿈꾸잖아요. 그 굳고 단단한 나이테가 생성되는 시기가 바로 중년의 시기지요. 과연 나는 내려놓을 것 내려놓고, 보낼 것 보내면서 굳고 단단하게 살고 있는 지 생각하게 하네요.

공자는 내 나이에 하늘의 뜻을 알았다[知天命]고 해요. 참 놀라운 사람이지요? 그런데 나는 지금도 공자가 사십 때에 넘어섰다는 불혹不惑의 단계조차 넘지 못하고 있네요.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시기가 중년일까요?

단테는 자신의 인생길을 반 고비 넘기며,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나는 어두운 숲 속에 있었다”라고 고백해요. 이 고백으로 시작하는 작품이 바로 단테의 <신곡>이지요. 사실 단테는 이 <신곡>을 쓰면서 제목을 그냥 평범하게 ‘희극commedia'라고 지었어요. 그런데 후대에 단테를 존경했던 보카치오Boccaccio가 제목 앞에 ’신적인divina'라는 형용사를 붙였지요. 그래서 우리에게 단테의 작품은 <신곡la divina commedia>이라고 알려지게 된 거예요. 이 영광스런 개명을 단테가 좋아했을까요? 나는 오히려 그냥 원제목 그대로 두었으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읽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각설하고.


어쨌든 올바른 길을 잃고서 어두운 숲 속을 헤매던 단테는 숲 속에서 세 마리 짐승을 만나지요. 표범과 사자와 늑대예요. 다분히 상징적인 동물들인데, 표범은 색욕이나 부절제, 사자는 권력이나 폭력, 늑대는 탐욕을 뜻한대요. 중년의 시기에 만나는 이 상징적 동물들은 충분히 명상할 거리를 제공하지요. 당신에겐 어떤 동물이 가장 위협적인가요?

신곡 윌리엄 블레이크.jpg 단테 앞에 나타난 세 마리 짐승 -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아직도 성욕이 팔팔하신가요? 주체하지 못하는 그 힘 때문에 고민이신가요? 그렇다면 참 부럽네요. 비아그라 산업의 유혹에서는 벗어난 거니까요.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광란의 섹스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나이가 되어버린 사람에겐 오히려 표범의 유혹이 더 치명적이지 않을까 생각도 드네요. 중년의 바람기라고나 할까?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오히려 안 잡혀서 더 애간장을 태우는, 그래서 더 갈망하는 나이가 중년이니까요.

권력욕에 사로잡히면 헤어 나오기 참 힘들지요. 그게 뭐라고 하며 외면하기도 하지만 막상 권력이 자신에게 주어지면 놓지 못하는 것이 평범한 사람의 속성이니까요. 집안의 작은 권력에서부터 직장에서 누리는 권력,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의 지위나 권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사자는 그렇게 늘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우리를 유혹하지요.


단테는 늑대를 탐욕의 상징으로 그려놓았지만, 사실 늑대는 그런 동물이 아니래요.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도 강하고 연대정신도 드높은 고귀한 동물이라네요. 어쨌거나 단테의 맥락을 따라가 보자면, 탐욕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욕망이 아닐까 싶네요. 단테도 이 늑대의 위험성을 알았던지 이렇게 묘사해 놓았어요.


또 비쩍 말라빠진 몰골에 온통

굶주린 듯 보이는 암늑대 한 마리

벌써 많은 사람을 산 채로 잡아먹었으련만……

이놈을 보니 무서움이 솟아나

나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꼭대기로 향한 희망을 잃었다.


늑대로 인해 희망을 잃어버린 세대. 올바른 길을 선택하지 못하고, 어두운 숲 속으로 다시 돌아서게 만드는 늑대.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할 것이 아닐까 하고 깜짝 놀라게 하네요. 그도 그럴 것이 늑대를 묘사는 다음 구절 때문이에요.


마치 기뻐 날뛰듯 재물을 긁어모으던 자

그것을 잃어버릴 때가 이르자

온통 그 생각만 하며 울고 괴로워하듯,

그 맹수도 안절부절 못하며 내게 그리하였다.


욕망 중에서도 재물욕이야말로 우리는 사로잡기에 충분하지요. 재물을 의인화하면, 나는 지금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고 고백할만 하지 않은가요? 모든 욕망을 초월하여 모든 욕망 위에 군림하며 모든 욕망을 단 하나의 욕망으로 수렴할 수 있는 욕망, 재물욕! 그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지요.

<신곡>의 단테는 그 욕망이 무서워 다시금 어두운 숲으로 후퇴합니다. 나를 살려달라며 고함칩니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Vergilius지요. 단테는 이 위대한 시인을 여행의 가이드로 삼아 지옥과 연옥을 경험하고, 천국으로 향하는 10일간의 대장정을 시작하게 되지요. 그 10일간의 상상적 여행의 기록이 바로 <신곡>이예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버리면 그대가 <신곡>을 안 읽을까봐 여기에서 적당히 스포일러짓은 그만 하렵니다.

나는 단테의 <신곡>을 중년의 방랑기로 읽었습니다. 단테야 사랑하는 베아트리체의 인도로 천국에 이르지만, 내가 어느 곳에서 생애를 멈출지는 아직 미지수니까 계속 살아봐야겠지요. 나도 단테처럼 사랑이 나의 생애를 구원할까요? 그대는 어떻습니까? 이 가을 중년의 한가운데에서 서성이는 당신에게 <신곡>을 읽어보라고 권유하고 싶네요.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스포일러. 아마도 <신곡>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아닐까 싶네요.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와 지옥문을 들어가는데, 지옥문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나를 거쳐서 고통스런 마을로 가고

나를 거쳐서 영원한 고통 속으로 가며

나를 거쳐서 저주받은 무리 속으로 간다.

(……)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온갖 희망을 버릴지어다.


여기서 ‘나’는 물론 지옥문을 이야기합니다만, 나는 ‘나’를 읽으며 자꾸 ‘나’가 내가 아닐까 착각합니다. 나를 통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옥을 경험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내 속에 지옥이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지옥은 내 밖과 안에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몸서리치도록 경계하고 경계할 일입니다.

그대여, 가을을 곱게 물든 단풍처럼, 아름답고 단단하게 자신의 삶을 돌보시길. 나도 그대가 부럽지 않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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