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50주년을 기억하며

전태일은 휴머니즘이다- 실존 철학의 눈으로 본 전태일

by 김경윤
이 글은 2010년 잡지 <리얼리스트>에 쓴 글입니다. 전태일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썼지요. 올해가 전태일 50주년이라 낡은 서재에서 꺼내 읽어봅니다. 이 또한 기념하는 일이라 싶습니다. 10년 전에 쓴 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눕니다.

전태일처럼 강밀도가 높게 살아간 사람이 인류의 역사에서 몇이나 될까? 남들은 평생 살아도 이루지 못할 생각의 깊이와 삶의 치열함을 전태일은 22살의 나이에 이루었다. 이루었다? 그의 생애가 22살의 나이에 마감되었으니 이루었다는 말은 반은 진실이고 반은 과장이리라. 그 역시 자신의 삶의 바퀴를 오래도록 굴리고 싶었을 테니까. 그의 생애를 철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차라리 종교적 접근이라면 수월할 수 있다. 그는 예수다. 처참한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그의 생애와 식민지 농민의 자식으로 자라온 예수의 생애는 무난히 겹친다. 어린 시절부터 배움에 열정이 있었다는 것도, 주변의 사람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던 것도, 그래서 자신의 몸을 던져 그들을 사랑했던 것도, 비록 작지만 자신의 공동체를 형성했던 것도, 결국 죽음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살을 살아간 것도, 그 이후에 역사에 남아 영원성을 확보한 것도 예수와 너무 닮았다. 그래서 장기표는 『전태일 평전』을 ‘전태일 복음서’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전태일의 생애를 철학적으로 살펴보려면, 그때의 철학은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강도 높고, 가장 생과 가까이 있고, 인간의 비참함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는 철학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철학이 있을까? 아마도 실존주의 철학이 가장 가까울 것 같다. 그래서 이 글을 실존주의 철학을 빌려 전태일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을 작은 목표로 삼는다.


1. 던져짐

- “인간은 던져진 존재이다.”(하이데거)

실존주의의 배경은 양차 세계대전이다. 전쟁은 인간에게 허무감과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전쟁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삶의 의미를 무화시키며 삶의 목적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산업화와 도시화는 인간의 공동체적 삶을 파괴하고 인간을 파편화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계화시키는 인간소외의 모습을 확인하게 한다. 고통, 죽음, 무(無), 두려움, 권태, 소외, 부조리……. 실존주의 철학에 등장하는, 어쩌면 가장 철학적이지 않은, 이러한 용어들은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다.

전태일의 생애를 보면 이러한 실존주의적 상황에 대한 전태일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전태일의 어린 시절 서울로 향하는 무임승차의 기차에서 전태일을 느꼈던 감정.


“그 무엇이 섞이지 않는 순수한 감정을 마음껏 음미하고 있을 때, 기차의 발차신호가 순수한 나의 감정을 빼앗아 버리고 또다시 차가운 현실에 나를 내동댕이치고 말았다.”(강조-필자)

“걱정과 막연한 불안감이 온 골을 다 점령하고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와 아버지의 엄하신 얼굴과 어머니의 처량하신 얼굴이 교차되면서 정말 이대로 조용히 목숨이 끊어졌으면 싶었습니다.”

15살의 어린 나이에 전태일은 이미 버려짐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추락하는 소년 전태일을 붙잡고 있었던 것은 그나마 가족(특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같이 가출한 동생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마저도 16살 때에는 여동생 순덕이를 버리고 “피를 말리는 불안감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면서 저주받은 자신의 삶을 거듭 증오하였다.


2. 삶의 가혹함

- “보람 없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 (카뮈, 『시지프의 신화』)


그 후 전태일은 남동생과 구두닦이, 신문팔이, 손수레 뒤밀이, 아이스케이크 장사, 우산장사 등 밑바닥 인생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게 된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와 재회하고 동생 순덕이도 보육원에서 찾아오면서 온 가족이 함께 살게 된다. 그리고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노동자로 취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나이가 16세. 시다로 시작한 그는 미싱 보조로, 그리고 미싱사로 1년 만에 지위를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밀폐된 닭장 같은 공간에서 30여 명이 넘는 종업원이 햇빛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14시간 일을 해야 하는 그곳은 또 하나의 지옥이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만성적인 질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착한 심성의 전태일은 어린 여공을 위하여 자신의 차비로 풀빵을 사주고 집까지 걸어오는 일이 다반사였고, 시다들의 허드렛일도 솔선하여 거들어주었다. 그럼에도 사업장의 상태는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그저 정신없이 일을 할 뿐. 전태일은 67년에 이런 일기를 남긴다.


“실제의 나는 일의 방관자나 다름없다. 내 육신이 일을 하고,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때까지의 육감과 이 소란스런 분위기가 몇 인치 몇 푼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 긋고 나라시가 되고, 다 되면 또 재단기계를 잡고 그은 금대로 자르는 것이다. 누가 잘랐을까? 이렇게 생각이 갈 때에는 역시 내가 잘랐다. 왜 이렇게 의욕이 없는 일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렴풋이 생각이 확실해질 때는 퇴근시간이 다 될 때이다. 세면을 하고 외출복으로 바꿔입고, 인사를 하고 집으로 오면 밥상이 기다리고 있다. 밥을 먹고 몇 마디 지껄이다가 드러누으면 그걸로 하루가 끝나는 거다.”

카뮈는 이렇게 아무런 의식도 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하늘 없는 공간, 깊이 없는 시간과 싸우며 끝없이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려야만 하는 가혹한 형벌”이라 표현하였다. 이 형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3. 책임감

- “너는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는 대표적인 실존주의 소설이다. 자신이 살던 별에서 함께 지내던 장미가 부담스러워지자 어린왕자는 자신의 별을 떠나 이 별 저 별로 여행을 한다. 그리고 이차저차 하여 지구라는 별에 도달하고, 거기에서 사막여우를 만난다. 그리고 여우에서 어린왕자는 아주 소중한 교훈을 얻는다. 여우 왈 ; “사람들은 그 진리를 잊어버린 거야. 그렇지만 넌 잊어서는 안 돼.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넌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는 거니까. 너는 네 장미에 대해서 책임이 있어…….”


나는 전태일의 위대함을 이 책임감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소박한 것 아니냐구? 아니다. 이보다 위대한 감정은 없을 것이다. 전태일이 바보회를 조직했던 것도, 그리고 평화시장에서 쫓겨나 공사판을 전전하다가 다시금 평화시장으로 돌아간 것도, 그리고 다시금 이길 수 없는 투쟁을 해나갔던 것도, 그래서 결국 죽음에 도달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책임감 때문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이해에 따라 영달과 출세의 길로 돌아설 때, 전태일 역시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전태일이 가고자 했던 길은 미싱사, 재단사, 또는 사장이 되어 출세하려는 길이 아니라 같이 고생하고 노동하는 동료에 대한 무한책임의 길이었다.

4. 각성

- “사랑은 활동이며 영혼의 힘이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하지만 책임감이 무모함이나 소영웅주의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연대와 각성이 필요하다. 전태일이 아버지에게 노동운동에 대해 듣고, 그 한자투성이의 노동법 책을 사서 힘겹게 공부했던 것도, 평화시장의 재단사들의 모임을 결성하여 ‘바보회’라고 이름 짓고 노동현실에 대하여 치열하게 토론했던 것도 모두 노동자로 각성해가는 단계였다. 스스로의 모임을 ‘바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각성’의 지표이다. 그 각성은 강자들 부자들이 가르쳤던 ‘적응’, ‘타협’, ‘겸손’, ‘순종’, ‘온건’ 등의 ‘미덕’과 결별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헛똑똑이와는 다른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 각성은 끊임없는 실천으로 전태일을 몰아갔다. ‘사랑은 활동’이기 때문이다.

전태일을 중심으로 모인 바보회는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평화시장 일대의 3만 노동자의 근로조건 개선과 조직강화를 목표로 하고 그 활동의 일환으로 노동실태를 조사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들의 활동은 금세 적발되고 전태일은 직장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렵사리 조사한 노동실태를 정리하여 시청의 근로감독관을 찾아갔으나 그마저도 무시당하고 말았다. 이제 출구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전태일의 영혼은 타락하지 않았다.

5. 결단

-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다시 한 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평화시장에 쫓겨난 전태일은 공사판으로 나선다. 그곳의 노동현실도 마찬가지였다. 전태일은 그곳에서도 앞장서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싸운다. 그럼에도 평화시장에서 벗어난 그는 처절하게 고독했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통과 분노를 이야기할 수 없는 현실은 더욱 그를 괴롭혔다. 그 고통과 고독 속에서, 그 밑바닥 인생에서 전태일의 사상은 무르익고 있었다고 조영래변호사는 진술한다. 이른바 ‘전태일 사상’이라는 것은 그렇게 싹이 트고 자라난 것이다. 조영래변호사가 정리한 전태일 사상은 이러하다. 1)전태일 사상은 밑바닥 인간의 사상이다. 하지만 2) 각성된 밑바닥 인간의 사상이다. 그 각성은 ‘거꾸로의 거꾸로’ 즉 거꾸로 된 사회의 가치관을 다시금 전복한다. 그래서 ‘노예에서부터 인간으로 거듭나는 민중의 사상’이다. 3) 그 사상은 억압받은 한 인간을 저항과 투쟁의 길로 인도한다. 그리하여 전태일 사상은 “기존 현실에 대한 이러한 철저한 비판으로 인하여 완전한 거부-완전한 부정의 사상으로 된다.”


그 완전한 거부-완전한 부정의 정신은 전태일이 쓴 ‘아닐세!’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아무리 화려한 생활의 연속이라도 감방 안에 갇힌 죄수가 감방 벽의 차가운 돌담에 화려한 그림을 그려놓고 자기도취에 취한 꼴이라고 말한 수 있겠지. 앞으로 가는 길이 어디며, 가야 할 곳도 목적도 모르며, 그저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는 것만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까? …… 젊은 피의 소유자인 인간 내가, 나 역시 화려하지도 못한 벽에 억지로 도취되어야 된단 말인가?

아닐세!”

4) 그리하여 “그의 사상은 근본적인 개혁의 사상, 행동의 사상”이 된다. 그 전태일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처럼 자본주의를 정치하게 분석한 사상도 아니며, 레닌주의처럼 전략과 전술을 가르고, 기존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치열하게 구축한 실천사상도 아니지만, 청년 노동자가 전태일이 온몸으로 깨닫고 구축한 것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그것은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세대”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고,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임을 성실하게 잊지 않았던 전태일의 개혁과 행동의 사상인 것이다.


나는 이 사상을 니체의 표현을 빌어 ‘초인의 사상’이라 말하고 싶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예언자 차라투스트라는 최대의 난관에 부닥친다. 그것은 중력의 영(靈)이고 반 난쟁이에다 반 두더지인 환영을 만났을 때였다. 그 환영은 니체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지혜의 돌이여! 너는 저 자신을 높이 던졌지만 그러나 던져진 모든 돌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너는 정말로 멀리 돌을 던졌지만 그 돌은 네 위로 다시 떨어지리라.” 그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기존 권력의 강력한 경고이다. 네가 아무리 저항해봐라. 세상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 너의 저항은 너의 투쟁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이다. 그래도 그 어리석은 짓을 계속할 것인가? 차라리 체제에 순응하라.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라.


그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 “용기는 가장 훌륭한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 그것은 죽음까지도 살해한다. 왜냐하면 용기는 ‘그게 삶이던가, 그럼 좋다. 다시 한 번!’ 이렇게 외치기 때문이다.”

이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전태일이 1970년 삼각산 엠마뉴엘 수도원에서 교회 신축공사를 하면서 마지막 결단을 했던 시기에 쓴 전태일의 일기와 묘하게 오버랩된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나는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6. 투쟁

-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19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전태일은 다행히도 재단사 자리를 구하고, 과거의 동지들과 새로운 동지들을 모아 ‘바보회’의 후신인 ‘삼동친목회’를 만들어 활동을 재개한다. 삼동친목회는 말이 친목회이지, “연소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고, 근로개선을 위해 공동으로 행동”하는 투쟁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이전보다는 좀 더 철저하게 보완을 지키면서 다시 실태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서울시청, 노동청을 찾아다니며 진정서도 내고 방송국에 찾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기적적으로 10월 7일 석간신문에 평화시장의 참상에 대한 보도가 실리게 된다. 신문에 나자 회사 측과 경찰 측에서는 한편으로는 그들을 회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협박을 하면서 그들의 활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공세를 늦추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자고 전태일이 제안했던 그날.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자살을 감행한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외치며 전태일은 그토록 소중히 아꼈던 근로기준법과 함께 산화된다.

전태일 평전의 저자인 고 조영래변호사는 전태일의 소망을 이렇게 정리했다.


“전태일에게는 참으로 바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나라였다. 약한 자도, 강한 자도, 가난한 자도, 부유한 자도, 귀한 자도, 천한 자도 모든 구별이 없는 평등한 인간들의 ‘서로 간의 사랑’이라는 참된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는 세상……”


그 세상을 실존주의적 언어로 ‘휴머니즘’이라 말한다. 이 ‘휴머니즘’이야말로 실존주의 철학을 압축적으로 진술한 언어이다. 온갖 어려움과 절망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인간의 길을 모색하려 했던 철학을 우리는 실존주의라고 말한다. 체제의 챗바퀴에 순응하는 ‘존재자’가 아니라 인간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 ‘존재’가 되려는 사상을 우리는 실존주의라고 한다. 하루하루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즉자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에 대하여 각성하고 반성하면서 성실하게 삶을 기획하는 사상을 우리는 실존주의라 한다. 현실을 거부하는 온갖 시도가 좌초되었을 때, 사랑과 영혼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는 사상, “그것이 삶이던가, 그럼 좋다, 다시 한 번!”이라고 외치며 결코 추락하지 않는 사상을 우리는 실존주의라고 한다. 그리고 그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그리하여 전태일은 휴머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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