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웅, 《마징가 계보학》(창비시선 254)
1. 마징가 Z
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서 살았다 밤만 되면 갈지자로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지만 고철보다도 진로를 더 많이 모았다 아내가 밤마다 우리 집에 도망을 왔는데, 새벽이 되면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돌아가곤 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이팬과 화장품을 창문으로 던졌다 계란 한 판이 금세 없어졌다
<마징가 계보학> 중
1967년생 시인 권혁웅. 시집에 있는 사진을 보니 환하게 웃고 있다. 선하게 생겼다. 젊어서 그런가? 궁금증에 인터넷을 뒤져 최근 사진들을 검색한다. 살이 조금 올랐지만 선한 기운은 여전하다. 장난기가 살아있다. 그가 2005년도에 쓴,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쓴, 《마징가 계보학》(창비시선 254)를 읽었다. 은유가 쓴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기도 했고, 제목도 나와 동시대인임을 분명히 알리는 것이었기에 기꺼이 9000원을 투자했다. 잘했다.
시집에는 내 어릴 적 즐겨 보았던 (만화) 영화 주인공으로 가득하다. 저절로 웃음을 머금게 하는 제목(주인공)들. 마징가, 애마부인, 미키마우스, 요괴인간, 투명인간, 가위손, 스파이더맨, 드래곤, 드라큘라, 독수리 오형제, 나폴레옹, 슈퍼맨, 배트맨, 엑스맨, 아톰, 원더우먼과 악당들, 돌아온 외팔이, 황금박쥐! 모두들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었던 주인공들이다. 만화영화의 경우 주제곡도 막 떠오른다. 추억 소환용으로 이만한 책이 따로 없다. 그런데 제목만 (만화) 영화 주인공이지, 내용은 모두 작가의 어린 시절 동네와 주변에서 같이 지내고 겪었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이야기이다. 시들은 적절한 비유와 유머와 위트에 깊은 페이소스를 곁들였다. 웃으며 읽었다가 찔끔 눈물을 흘리게도 한다. 피식 웃었다가 깊은 한숨으로 마무리된다. 이런 장난꾸러기 시인 같으니라고, 울다가 웃으면 000에 털이 나온다는데. 오늘 아주 나를 싸스콰치(설인괴물)로 만드는구먼.
그의 시에는 높은 사람이나 유명한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차라리 사라졌거나 잊혀진 존재들, 기억에 조차 머물지 않을 것 같은 존재들이 소환되어 시에 주인공으로 떡하니 등장한다. 그는 비루한 일상생활이나, 초라한 과거에서 만났을 법한 인물들을 빛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어린 시절 내 모습이 떠오르고, 그가 시에 등장시킨 인물들과 유사한 골목의 친구들과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래 이들도 충분히 시가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빠져들게 한다. 기억 바깥에 있었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 내 앞에서 웅얼거린다.
요즘에는 무슨 시집을 내었을까 궁금해졌다. 뒤져보니 요즘은 아니지만 2013년에 쓴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창비시선 369)가 검색된다. 아이고, 여전하구나. 제목을 훑어보니 이번에는 인물이 아니라 장소다. 도봉근린공원, 금영노래방, 불가마, CGV, 의정부부대찌개집, 춘천닭갈비집, 조마루감자탕집, 김밥천국, 오징어 나라, 24시 양평해장국, 포장마차, 조개구이집, 고려삼계탕집, 이발소까지. 나라도 한 번쯤은 가봤을 곳에서 무진장의 시를 길러내고 있었다. 일단 찜하자.
쭉 훓어내려가보니 평론집도 여러 권 냈구나. 평론집은 일단 패스! 어랍쇼, 사전류도 냈네. 《꼬리 치는 당신–시인의 동물감성사전》(마음산책, 2013), 《생각하는 연필-시인의 사물감성사전》(난다, 2014), 《미주알 고주알-시인의 몸감성사전》(난다, 2014), 《외롭지 않은 말-시인의 일상어사전》(마음산책, 2016) 등 범상치 않은 제목의 사전도 여러 권. 음, 모두가 감성사전이로군. 지름신의 강림하시려 한다. 이를 어쩐다. 일단 《외롭지 않은 말-시인의 일상어사전》만 찜해두자. 이 정도쯤 되면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직업인지, 책을 사는 것이 직업인지 헛갈린다. 아무렴 어떠랴. 시 한 번 찰지게 읽었다. 그럼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