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난다, 2013)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낭만주의 이후의 문학, 특히 시는 이 밤에 거의 모든 것을 걸었다. 시인들은 낮에 빚어진 분열과 상처를 치유하고 봉합해줄 수 있는 새로운 말이 “어둠의 입”을 통해 전달되리라고 믿었으며, 신화의 오르페우스처럼 밤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걸어들어가 죽은 것들을 소생시키려 했다. 그렇다고 반드시 이성 그 자체를 불신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성을 빙자하여 말과 이론과 법을 독점하고 있는 사회와 제도의 횡포에 있다. 낮에 잃은 것을 밤에 찾기란 결국 그 횡포의 희생자들을 복권하는 일이며, “어둠의 입”이 해줄 수 있는 말이란 현실에서 통용되는 말의 권력을 넘어선 역사의 말이자 미래의 말이다.(220~221쪽)
문학평론가이자 번역가로 활동하셨던 황현산 선생이 2018년 세상을 뜨셨다. 1945년에 태어나셨으니 74세까지 사신 셈이다. 별세하시기 5년 전인 1913년에 첫 에세이집 《밤이 선생이다》가 출간되었다. 진작에 사야지 생각하다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사게 되었다. 사놓고도 귀히 여겨 천천히 읽어야지 미루다가 이제야 읽었다. 제목의 영향인지 밤에 읽어야 제격일 것 같아, 밤을 패어 읽었다.
아, 한숨이 나왔다. 잔잔히 흐르는 글을 따라가다 보면 선생과 내가 살았던 강산이 보이고, 다른 곳에서 살았으나 어린 시절이 보이고, 신산했던 우리의 역사가 보인다. 그리고 그곳에서 올곧은 정신으로 세월을 관통하며 살았던 한 학자가 보인다. 그리고 그의 융숭하고 강골 있는 문체가 보인다. 그의 메시지는 강변하지 않지만 강하고, 웅변하지 않지만 깊다. 이런 류의 글쓰기는 나로서는 언감생심이다. 나의 한숨의 이유다.
내가 책 줄이나 읽으며 평생을 살아왔으나, 나의 마음을 뒤흔드는 에세이는 (물론 시절 시절마다 많았겠지만) 나이 들어 두 권이 오롯이 기억난다. 하나가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고 다른 하나가 이 책이다. 앞의 책을 1988년에 읽었고, 황현산 선생의 책을 2020년에 읽었으니 32년 만에 마음이 다시 흔들린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 나이에 다시 마음이 흔들리다니.
마음을 다잡고 다시 용기 내어 글 쓸 일이다. 인스턴트식의 글에 신물 나고, 포장만 근사한 택배식의 글에 실망했다면 황현산 선생의 에세이를 읽어보시라. 거나하게 차려진 진수성찬이 아니라 정성 들여 소박하게 마련된 조촐한 밥상의 깊은 맛을 분명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0년 동안 쓴 80편의 에세이에는 일관된 무엇인가가 있다.
“나는 내가 품고 있던 때로는 막연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생각들을 더듬어내어,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 그것을 가능하다면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 생각들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존경받고 사랑받아야 할 내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그리워했다. 이 그리움 속에서 나는 나를 길러준 이 강산을 사랑하였다. 도시와 마을을 사랑하였고 밤하늘과 골목길을 사랑하였으며, 모든 생명이 어우러져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었다. 천년 전에도, 수수만년 전에도, 사람들이 어두운 밤마다 꾸고 있었을 이 꿈을 아직도 우리가 안타깝게 꾸고 있다. 나는 내 글에 탁월한 경륜이나 심오한 철학을 담을 형편이 아니었지만, 오직 저 꿈이 잊히거나 군소리로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작은 재주를 바쳤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4~5쪽)
서문에 나오는 글을 그대로 옮겼다. 자연, 자유, 평등, 건강, 행복 등 낡아 보이는 말들이 어떻게 새로운 옷을 입고 등장하는지 글을 찬찬히 읽어보시라. 에세이를 쓰고자 하는 이는 기꺼이 따를 수 있는 경전 한 권을 얻은 셈이다.
<추신 1> 책에는 ‘밤이 선생이다’라는 제목의 글이 없다. 문장 전체를 뒤져봐도 그러한 문장조차 없다. 그러나 그가 밤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밤의 시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처음에 인용한 구절이 그 증거다.
<추신 2> 표지에 나오는 검은색을 배경으로 노인의 글 쓰는 뒷모습과 작가 소개에 나오는 촛불을 배경으로 한 황현산 선생의 모습은 묘하게 어울린다. 표지그림의 작가는 팀 에이텔(Tim Eitel)이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더 많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추신 3> 인터넷 알라딘에서 제공하는 웹포스터를 옮긴다. 저자의 잔잔하고 묵직하면서도 빛나는 문체를 맛볼 수 있다.